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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면의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906
한자 聖淵面-集姓村
영어음역 Seongyeonmyeonui Jipseongcho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집필자 이은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별 집성촌 주소 오사리 이씨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새방 한씨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평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예덕리 민씨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일람리 박씨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일람리 지도보기
성격 집성촌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의 집성촌은 조선 시대에 여러 성씨가 입향한 후 대대로 거주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성연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오사리 이씨[전주 이씨], 새방 한씨[청주 한씨], 예덕리 민씨[여흥 민씨], 일람리 박씨[밀양 박씨] 등이 있다.

[명칭 유래]

오사리 이씨(梧沙里李氏)는 임진왜란 때 해유치(蟹踰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영의정이 된 이양원(李陽元)[1526~1592]의 후손들로 이곳 오사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새방 한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서산 입향조인 한효순(韓孝純)[1543~1621]의 아들 한치겸(韓致謙)[1574~1608]이 성연면 평리에서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그 집을 ‘새방집’이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새방 한씨’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덕리 민씨(禮德里閔氏)는 성연면 예덕리에 여흥 민씨(麗興閔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람리 박씨(日藍里朴氏)는 일람리의 대표적인 동족 성씨로 인구수도 많아 자연스럽게 일람리 박씨라는 이름을 얻었다.

[형성 및 변천]

오사리 이씨는 전주 이씨 선성군파(宣城君派)로 임진왜란 때 해유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영의정이 된 이양원의 후손들이 정착한 이래 300여 년간 약 25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후손들이 이양원의 묘가 있는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일대로 대다수 이거하여 현재는 집성촌이 거의 해체되었다.

새방 한씨는 청주 한씨로,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이 서산에 정착한 후 그의 3남인 한치겸이 이곳에 새집을 짓고 정착하면서부터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이후 300여 년 동안 10대가 거주해 오면서 한때 220명이 넘는 큰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모두 도심으로 떠나고 단 한 가구만이 남아 있다.

예덕리 민씨는 여흥 민씨로, 입향조 민형남(閔馨男)[1564~1659]이 마을에 정착하여 한때 집성촌로 번성하였으나 번창하지 못하고 집성촌이 해체되었다.

일람리 박씨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1500년대 초 박율(朴栗)이 일람리에 입향한 이래 약 490년간 13대째 살아오고 있는 집성촌이다. 한때 일람1리, 일람2리 일대에 1926년경까지 150명이 넘는 인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60년대부터 도시로 떠나 집성촌이 해체되고 현재는 약 5가구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자연 환경]

오사리 이씨 집성촌이 위치한 오사리는 과거 사장골[沙場谷]이라 불리던 곳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토질이 자갈과 모래땅이고 수원(水原)이 없어 논농사 짓기는 부적절하였지만, 1970년대에 들어 전기가 들어오고 농로가 뚫리면서 고소득 작물 재배지로 바뀌어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예덕리 민씨 집성촌이 위치한 예덕리는 아직까지 자연경관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숲에는 백 년은 넘어 보이는 송림(松林)이 있어 잘 가꾸어진 농촌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일람리 박씨 집성촌이 위치한 일람리에는 세 개의 깊은 계곡이 있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시냇가에는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난 마을이었다. 또 서산 지방 특성이 대체로 산촌(散村)인데 비하여 일람2리 일흔이마을은 집단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곳이다.

[현황]

오사리 이씨 집성촌은 2011년 현재 4가구만 남아 있어 집성촌은 해체되었다. 새방 한씨 집성촌은 조선 중엽부터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 말에서 구한말까지 절정을 이루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주민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이름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예덕리 민씨 집성촌과 일람리 박씨 집성촌은 마을 환경은 아직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집성촌은 해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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