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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799
한자 集姓村
이칭/별칭 동족마을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마을.

[개설]

집성촌은 혈연관계가 있는 동성(同姓)의 여러 집이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를 동족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 중엽 이후의 향촌 사회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친족 의식이 일반화되었다. 이전까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과 공평한 재산 분배 등의 풍습에 따라 사위, 외손자 등 성(姓)이 다른 친족이 한 마을에 살았다. 그렇지만 1600년대 이후에는 장남이 제사를 모시며 봉사조의 재산을 상속받고, 여성이 출가외인이 되는 친족 관계로 바뀌었다. 이러한 가운데 문중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선산과 묘소를 마련하고 재실을 건립하여 족계를 하는 것, 이에 더하여 문중의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는 등 친족 조직을 공고히 하며 집성촌을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서산 지역의 집성촌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토착 성씨로 서산을 관향으로 하는 서산 정씨서령 유씨의 집성촌이 확인되며, 지리지·읍지류의 성씨조에 등재된 성씨의 집성촌도 있지만 이들의 경우 기록에 본관이 기재되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 대부분의 집성촌 입향조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이후에 이거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오랫동안 이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왔기 때문에 본관을 붙여 부르기 보다는 오히려 거주하는 지역의 마을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예들 들어 평양 조씨 대신 ‘상리 조씨’, 경주 김씨 대신 ‘한다리 김씨’, 전주 이씨를 ‘당꾸지 이씨’라 부르는 것이다.

[형성]

집성촌이 형성되는 것은 문중 활동이 보편화되는 시기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으며, 다양한 문중 활동의 기초 단위이자 중심처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집성촌에는 정려 또는 서원·사우 및 신도비류의 유적이 남아 있거나 종가·족계 운영 과정에서 생산된 각종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서산에서는 성암서원(聖巖書院)송곡서원(松谷書院) 등 역사 깊은 서원의 배향 인물인 서령 유씨, 경주 김씨 등과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과 관련된 청주 한씨, 그리고 조선 전기 왕실과 관련 있는 전주 이씨 등의 성씨가 조선 후기 기타 성씨의 입향 계기를 마련하는 이른 시기의 세거 사족 성씨이다. 이들의 집성촌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서산에서는 집성촌의 현황에 대한 전수 조사가 이루어진 바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사회 경제 상황을 파악하고자 발행한 『조선의 성』에서 집성촌 상황이 소략하게 정리되었고, 1927년에 이민영이 편찬하고 중앙인쇄소에서 간행한 『서산군지』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96년 서산향토연구회에서 발간한 『서산의 문화』 8에 일부 정리된 내용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서산 지역 집성촌을 면별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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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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