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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904
한자 高北面-集姓村
영어음역 Gobungmyeonui Jipseongcho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집필자 이은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별 집성촌 주소 양천 조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양천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산밑 김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1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가구 김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가구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통개 최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기포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봉생 엄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황골 문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신정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날새 오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신상리 지도보기
성씨별 집성촌 주소 금도 박씨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남정리 지도보기
성격 집성촌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에 있는 집성촌.

[개설]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의 집성촌은 조선 시대에서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대대로 거주하며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북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씨로는 양천 조씨(楊川趙氏), 산밑 김씨, 가구 김씨(加口金氏), 통개 최씨, 봉생 엄씨(鳳生嚴氏), 황골 문씨[黃谷文氏], 날새 오씨, 금도 박씨(金島朴氏) 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에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룬 특징을 보인다.

[명칭 유래]

양천 조씨는 한양 조씨(漢陽趙氏)가 고북면 양천리에 살게 됨으로써 얻은 명칭이다. 산밑 김씨는 마을이 위치한 곳에 동북쪽으로 해발 440m의 연암산(燕岩山)이 있어 이를 배산(背山)으로 하고 동남으로 해발 489m의 삼준산(三峻山)을 끼고 서편으로 향한 마을이어서 얻은 이름이다. 가구 김씨는 산밑 김씨의 입향조 김서(金瑞)의 장증손 김한상(金漢尙)이 고북면 가구리로 이사와 후손들이 늘어나 살면서 얻은 이름이다.

통개 최씨는 통개마을에 살게 됨으로 얻은 명칭인데, 통개라는 마을 이름은 ‘틀개[機浦]’의 변화된 이름이라 한다. 기포리(機浦里)는 옛날 이곳이 배가 접안하는 항포구(港浦口)였을 때 배가 접안하는 배 턱에 나무로 짠 빈지가 만들어져 있음으로 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봉생 엄씨는 고북면 봉생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이름이다.

황골 문씨는 입향조 문창(文昌)이 황곡마을에 입향하면서 부르던 것이 어느덧 변하여 얻은 명칭이다. 날새 오씨는 보성 오씨가 날새마을[新興村]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얻은 명칭이다. 날새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신상리(新上里) 전체의 마을 이름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금도 박씨는 입향조 박대현(朴大賢)이 고북면 남정리 금도마을에 정착하여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양천 조씨는 한양 조씨의 시조인 조지수(趙之壽)의 13세손 김제군수 조춘란(趙春蘭)이 고북면 양천리에 입향한 이래 12대째 9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 면장 조동원(趙東元), 전 면장 조병익(趙炳益), 전 면장 조병구(趙炳九), 전 보령군수·금산군수 조병남(趙炳南), 전 중학교 서무과장 조병업(趙炳業), 전 태안군수 조철행(趙喆行), 전 충청남도청 생활복지국장 조춘자(趙春子), 전 강원도청 정무부지사 조관일(趙寬一), 검찰청 사무관 조동규(趙東奎), 충청남도청 계장 조병영(趙炳瑛), 농촌진흥청 과장 조석행(趙晳行) 등이 있다.

산밑 김씨는 고북면 장요1리 산밑마을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이들은 상촌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으로 김자수의 10세손 김서가 입향한 이래 12대에 걸쳐 집성촌을 이루었다. 가구 수가 많을 때는 50~60가구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현대 인물로는 을지대학교 교수 김을환(金乙煥), 전 고북농협장 김두환(金斗煥), 전 반양초등학교장 김의환(金義煥), 전 태안군청 내무과장 김기현(金奇玄), 전 신학대 총장 김풍환(金豊煥), 미국 신학대학원 목리학박사 목사 전북노회장 김기숙(金奇淑),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행정실장 김지홍(金知鴻), 의학박사 김기업(金基業), 이학박사 김병철(金丙哲), 이학박사 김기출(金基出) 등이 있다.

가구 김씨는 경주 김씨로, 앞서 설명한 산밑 김씨의 입향조 김서의 장증손 김한상이 가구리로 이거한 후 후손들이 늘어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가구 김씨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룸으로써 한때 고북면에서 가장 번성한 집성촌이었다. 대표적인 현대 인물로는 전 면장 김기정(金基正), 전 서산중학교장 김기훈(金基勳), 교육심리학 박사 김영호(金榮鎬), 고북농협장 김기혁(金基爀), 전 홍성세무서장 김기화(金基和), 전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 김옥호(金沃鎬), 충청남도청 법무담당관 김기병(金基丙), 의학박사 김택경(金澤暻), 법학박사 김사리(金紗理), 해군 중령 김광호(金光縞), 의학박사 및 철학박사 김택훈(金澤勳), 철학박사 김택상(金澤相) 등이 있다.

통개 최씨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 입향조 최휴(崔休)가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16대를 이어왔다. 1926년경 30가구 정도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근대 인물로 최중관(崔中觀)이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전 고북농협 조합장 최수찬(崔洙璨), 전 서산시의회 의원 최옥룡(崔玉龍), 전 농협중앙회 서산지부장이며 현 당진군지부장인 최병옥(崔柄玉), 공학박사 최종필(崔鍾必) 등이 있다.

봉생 엄씨는 영월 엄씨(寧越嚴氏)로, 고북면 봉생리에 조선 후기 엄섬(嚴暹)이 입향한 이래 16세손까지 내려왔다. 1926년에 간행된 『서산군지』에 의하면 12세손에 40가구의 집성촌이고 대표 인물은 엄주형(嚴柱衡)으로 되어 있다. 현재에도 봉생마을에는 엄씨들이 40여 가구가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현대 인물로 전 진천고등학교 교감 엄헌용(嚴憲鎔), 전 경위 엄동용(嚴東鏞), 전 통신공사 연구개발행정관리관 엄중포(嚴重鋪), 영등포구청 사무국장 엄낙용(嚴洛鎔), 문화재청 사적명승국장 엄승용(嚴承鎔), 백제문화사업소 관리과장 엄일섭(嚴一燮) 등이 있다.

황골 문씨는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창이 고북면 신정리 황골[黃谷]에 입향한 이래 16대를 면면히 이어와 1926년경에는 30가구가 넘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주상(文注相)이 있었고 현대 인물로는 전 명지초등학교장 문경희(文敬熙), 전 고북면사무소 재무계장 문병국(文炳國) 등이 있다.

날새 오씨는 보성 오씨(寶城吳氏)로, 1620년(광해군 12) 경에 입향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그 후 계속 늘어나 1926년에는 35가구로 늘어났었고 주변 마을까지 합하면 60가구가 넘는 집성촌이 되었다. 대표적인 근대 인물은 오치상(吳治相)이고, 현대 인물로는 현 고북면장 오창표(吳昌杓), 전 온양경찰서장·거제경찰서장 오치운(吳治雲), 전 고북초등학교·해미초등학교 교사 오병목(吳炳穆), 천안제일고등학교장 오병률(吳炳律), 서산경찰서 동부원북파출소 소장 오재규(吳載圭), 농촌진흥청 서기관 오병택(吳炳澤) 등이 있다.

금도 박씨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1608년(선조 41) 경 좌랑공 박대현이 고북면 남정리 금도마을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가 전성 시기로 116가구에 이르는 큰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196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로 떠나면서 이제는 30여 가구만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금도 박씨들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서산군수·홍성군수·공주군수·논산군수·예산군수·부여군수·아산군수를 역임한 박유진(朴有鎭), 전 운산면장 박윤진(朴允鎭), 전 대한통운사장 박성대(朴成大),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원 박준상(朴準祥), 전 당진군수·청양군수 박영동(朴永同), 천안정보고등학교장 박준구(朴準九), 신경외과 의사 박양화(朴陽和), 관광학박사 박경호(朴景浩), 미국 공인 회계사 박성식(朴晟植), 약학박사 박은정(朴恩政), 약학박사 박준영(朴準瓔), 변호사 박재현(朴裁賢), 공학박사 박재형(朴宰亨) 등이 있다.

[자연 환경]

양천 조씨 집성촌이 있는 양천리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부터 이어온 것으로 확인이 된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의 제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마을의 경관을 한껏 아름답게 보이게 하였음으로 마을 이름이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산밑 김씨 집성촌은 배산인 연암산이 자연 경관도 뛰어나지만, 구한말 한국 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鏡虛)가 오랜 기간 머물렀던 천장암(天藏庵)이 있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가구 김씨 집성촌은 연암산 서편 구릉으로 질펀히 펼쳐진 평원에 위치하고 있다. 광복 전후까지는 순수한 농촌이었으나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자연 여건을 지녔고, 고북면 소재지가 되면서 점차 발전하였다. 인근에 농공 단지가 세워짐에 따라 앞으로도 변화가 예견된다. 통개 최씨 집성촌은 지형상 평원 마을로 천수만 바다와 직접 연접해 있었다. 국도 29호선 도로 하나를 끼고는 가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봉생 엄씨 집성촌이 위치한 봉생1리를 큰말[大村]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 꼬막, 갈치, 도미, 주꾸미, 대합 등의 수산물이 많이 잡히던 곳이었다. 특히 꼬막은 전국에서도 수확량이 많아 손에 꼽았으며, 이는 이 일대 엄씨 집성촌의 경제적 근간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다가 모두 막혀 이러한 자연환경의 혜택은 모두 없어졌다.

황골 문씨 집성촌은 산이 없고 바다가 넓게 펼쳐진 평야마을로 역시 곡창 지대였다. 또 마을 앞 바다에서는 역시 많은 양의 꼬막이 생산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주민 소득이 높았던 마을이다. 그러나 천수만이 막혀 그러한 자연환경의 혜택은 이제 모두 없어졌다.

날새 오씨 집성촌이 위치한 신상1리 날새마을은 남동쪽으로 멀리 위치해 있는 연암산의 서편으로 흘러내린 평원의 저산성 구릉 지대인데, 날새말[新興村] 이외에는 소하천이나 샘이 없는 지역이어서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신상리의 넓은 평원 중 농장말[農場村]이나 비행기들[飛行機坪]에는 일반 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웠고, 주로 신상1리 날새마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보성 오씨의 집성촌이 형성될 수 있었다.

금도 박씨 집성촌이 위치한 금도마을은 고북면 남정1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산이 전혀 없는 평원에 위치한 마을이라 남정리(南井里)라는 이름과 같이 샘[井]을 지표로 삼는 곳이다. 이 금도(金島)는 일명 ‘쇠섬’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이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었던 것을 둑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섬의 옛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현황]

양천 조씨 집성촌은 주민들이 1960년대부터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는 40여 가구만이 남은 순수 농촌 마을이다. 산밑 김씨 집성촌은 1960년대부터 교육받은 후손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서 이제는 30여 가구만이 남아 있다. 가구 김씨 집성촌은 한때 80~90가구가 살았었으나 모두 외지로 나가고 이제는 50여 가구가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다른 동족에 비하여는 인구가 많은 집성촌이지만, 이는 마을이 고북면 소재지이기 때문으로, 이제는 가구 김씨만의 집성촌으로 유지되기는 불가능하다.

통개 최씨 집성촌에는 지금도 여전히 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한편 고북면사무소 외의 고북초등학교, 고북중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과 시장이 대부분이 통개에 있어, 실질적으로 고북면의 중심 기능을 하는 마을로 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봉생 엄씨 집성촌은 마을 형성 이래 큰 변화 없이 살아 왔었다. 마을과 접한 천수만에서 무진장으로 잡히는 꼬막과 생선들은 엄씨 집성촌을 풍요롭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27년 간행한 『서산군지』에서도 봉생 엄씨는 중산층 이상으로 일정 이상의 경제적 풍요로움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변화는 1985년에 완료된 서산A지구 매립 공사로 인하여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맞아 많은 엄씨들이 고향을 떠난 것이다.

황골 문씨 집성촌은 1960년대 초부터 외부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더니 1980년대 말 이곳에 생긴 비행장으로 대부분의 땅이 흡수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 사는 문씨(文氏)는 단 5명뿐이며 집성촌은 해체되었다.

날새 오씨 집성촌도 현재는 거의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날새 오씨 역시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부터 거의 외지로 떠나면서 현재는 14가구만이 남아 있다. 또한 마을의 가운데를 국도 29호선이 가로질러 가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아늑한 집성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금도 박씨 집성촌은 출향 인사까지 감안한다면 그 구성원의 수가 많은 편이나 역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6.27 내용 수정 활골 문씨->황골 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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