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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국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793
한자 潭陽鞠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92년 이후연표보기 - 담양 국씨 입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128년연표보기 - 시조 국주 고려에 귀화
본관 담양 -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세거|집성지 세거지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국현남 아버지 묘소 - 충청남도 부석면 마룡리 다리 위 유좌원
묘소|세장지 국현남 묘소 - 충청남도 부석면 지산리 소도비산 상봉 건좌원
성씨 시조 국주
입향 시조 미상

[정의]

국주(鞠周)를 시조로 하고 임진왜란 후 입향한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개설]

담양 국씨는 조선 전기 서산의 지리지나 읍지의 성씨조나 인물조에 나타나지 않는 성씨로 임진왜란 이후 서산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1646년 『인조실록(仁祖實錄)』 5월 23일 기사에는 서산 사람 조시응(趙時應)이 정원에 나아가 유학(幼學) 국성유(鞠聖兪) 등의 역모를 상변(上變)했다는 내용이 있다. 국성유국현남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담양 국씨 기유년[1729] 족보에는 ‘성유(聖喩)’라고 기록되어 있고, 갑인년[1973] 족보에는 ‘현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산 사람 조시응이 정원에 나아가 상변하기를, ‘서산에 사는 유학 국성유와 그의 아들 국진호(鞠震虎)가 홍주(洪州)와 덕산(德山) 등지의 한량 및 서얼 10여 명과 역모를 함께 모의하여 3월 27일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그때 경성의 숙위(宿衛)가 매우 삼엄하다는 소식을 들은 까닭에 날짜를 물려서 가을을 기다렸다 다시 거사하려 하고 있습니다.’하니, 정원이 입계하였다. 상이 대신과 금부 당상 및 양사의 장관들을 명초(命招)하여 대궐 뜰에서 추국하게 하고, 금부도사를 보내 국성유 등을 체포케 하는 한편, 별도로 중사(中使) 1인을 보내 그 집안의 문서를 수색해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면 담양 국씨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운 사람은 같은 서산 사람이었다. 아마도 두 집안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관련하여 『서산의 문화』 20호에는 국현남의 제자 이철(李哲)의 선대 묘소가 있는 땅을 다른 성씨가 차지하려고 하자 국현남이 증인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자들이 국현남을 역모로 몰아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임금이 직접 국성유 등 11인을 친국하면서 도사 이시억(李時億)을 보내 조사하도록 하여 조시응이 무고한 것이 드러나자 마침내 국성유 등 11인을 석방하고 조시응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담양 국씨 집안은 1646년(인조 24)의 불미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정려 건립을 이루어내는 등 재지 사족의 위치를 굳혀 나갔다. 특히 1694년(숙종 20) 송곡향현사[현 송곡서원]가 창건되는 과정에서 그 건립 주체가 서령 유씨였고, 국현남의 부인이 서령 유씨라는 점으로 보면 담양 국씨서령 유씨 간의 협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원]

담양 국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시조는 국주이다. 국주는 중국 송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 간 정란(政亂)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인종 6)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금나라를 왕래하면서 군신 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 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를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에 봉하고 담양을 본관으로 정해 주었다.

[입향 경위]

담양 국씨는 서산의 읍지의 성씨조나 인물조에 나타나지 않는 성씨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1600년대 중후반경에 서산 지역에 입향한 성씨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현남의 모친이 문화 유씨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았으며, 국현남의 부인 또한 서산의 유력 성씨인 금헌 유방택(柳方澤)류방택]의 후손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외가나 처가와의 인연으로 입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황]

국현남의 후손들이 여전히 서산에 거주하고 있다. 국현남의 아들 대에서 분가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장남 국정한(鞠廷翰)의 후손은 경상도 함안 지방에 세거하고 있으며, 차남 국정익(鞠廷翊)의 후손은 서산과 태안, 서울 등지에 많다. 정려가 있는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서당골에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고, 가까운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도 후손들이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관련 유적]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서당골에는 1695년(숙종 21) 건립된 효자 국현남의 정려가 위치하며, 부석면 마룡리 다리 위 유좌원에는 국현남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데 후손들이 매년 10월 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국현남의 묘소는 부석면 지산리 소도비산 상봉 건좌원에 위치한다.

서산과 인접한 태안군 소원면에서는 국현남의 5세손인 통덕랑 국사지(鞠思智)의 처의 열녀문이 있고, 9대손 국상식(鞠相植)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유림 일동과 서산군수가 세운 쌍효비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5.18 내용 수정 입향경위 문장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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