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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770
한자 無學大師-看月島無堂寺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6년 12월 27일연표보기 - 서산군 부석면 창리에서 김창학[남, 79]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서산민속지』하 수록
관련 지명 간월암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지도보기
채록지 서산군 부석면 창리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지도보기
성격 전설|사찰연기담|풍수담
주요 등장 인물 무학대사|한양 조씨|서부 안씨
모티프 유형 환생|명당 파손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무학대사의 예언에 따른 환생을 기려 무당사란 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찰연기담이자 무학대사가 머물던 절터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풍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1년 서산문화원에서 간행한 『서산민속지』 하의 179~181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최운식·김창진 등이 1986년 12월 27일 충청남도 서산군 부석면 창리[현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김창학[남, 79]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옛날 무학대사간월도의 절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이 절의 한쪽에 커다란 떡갈나무가 있었다. 하루는 대사가 절을 떠나면서 시중드는 이에게,

“나는 여기에서 떠나련다. 만일 이 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무의 잎이 다시 나오면 내가 산 줄 알아라.”

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남기고 떠난 뒤 나무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절에 머물던 사람들은 대사가 죽은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절터에 한양 조씨가 조상의 묘를 썼다. 이곳이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 조상 묘를 쓴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 우환이 있자 파묘하기에 이르렀다. 한양 조씨가 묘를 파니 안에서 화기(火氣)가 충천하였고 시신 또한 화기에 싸여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 뒤 다시 서부 안씨가 같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썼다.

이 무렵 죽었던 떡갈나무에 새 잎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무학대사가 환생한 조짐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이 관할 관청에 알려지자 관에서는 옛 절터에 무학대사를 기리는 사찰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래서 서부 안씨에게 넉넉하게 보상하여 파묘하도록 하고 그 자리에 무당사란 절을 지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의 주요 모티프는 환생, 명당 파손 등이다. 무학대사가 비록 환생의 직접적인 인물이 등장하진 않지만 예언을 통하여 환생을 예고하고, 그 예언이 실현됨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명당 파손의 사례도 보인다. 한양 조씨가 파묘를 하는 가운데 땅의 화기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고 하는 대목이 나타난다. 이처럼 명당이 훼손되었음에도 그 뒤에 묘를 쓴 서부 안씨는 순조롭게 잘 사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점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이 자리가 뛰어난 곳이라고 인식한다. 한 번 파손된 자리임에도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서산시에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로는 「토끼섬과 무학대사」, 「무학대사가 잡아준 묫자리」,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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