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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43
한자 李喆榮
영어음역 Yi Cheolyeong
이칭/별칭 윤숙(允淑),부재(復齋),정우(靜寓),이의영(李宜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이철영 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8월연표보기 - 서산경찰서에 뛰어 들어가 합방의 부당함과 ‘척왜(斥倭)’외침
몰년 시기/일시 1945년 2월연표보기 - 이철영 졸
추모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서산 군민장으로 장례
추모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서산시청 앞에 추모비 건립
출생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 지도보기
활동지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읍 기지리
활동지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
묘소 이철영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연안. 자는 윤숙(允淑), 호는 부재(復齋) 또는 정우(靜寓). 문충공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이인승(李仁承)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활동 사항]

이철영(李喆榮)[1884~1945]은 1910년 8월 서산 읍내에 있는 경찰서 게시판에 한일합방에 대한 방문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포고문을 찢어 버렸다. 게시판을 부숴 불을 지르고 서산경찰서에 뛰어들어 합방의 부당함과 ‘척왜(斥倭)’를 외쳤다. 이철영은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수감되어 3개월 간 고문을 당했다. 공주 감옥으로 이감 도중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호송을 담당한 일본 경찰 두 명을 죽이고 몸을 피했다.

이곳저곳 떠돌던 이철영은 서산 가야산으로 들어와 약초를 캐면서 살았다. 우연히 동생 이우영(李又榮)의 처남 최숙현(崔淑鉉)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름을 이의영(李宜榮)으로 바꾸었다. 그 후 인근 당진군 송악읍 기지리 노공재(盧公在)의 집에 머물면서 한학을 가르쳤고, 송산면 부곡리 등지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43년 30여 년 만에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넷째 동생인 이학영(李學榮)의 집에서 지내다가 1945년 2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 연안 이씨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45년 2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서산 유림과 제자들의 주도 아래 서산 군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60년 서산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산시청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철영이 후학을 양성했던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읍 기지시리에는 이철영의 추모기(追慕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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