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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49
한자 農民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9년 10월 24일 -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 주가 대폭락으로 인한 공황 발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1월연표보기 - 서산 천도교 종리원 시민 강화회 물가 감하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 4월연표보기 - 조선농지령 발표
성격 농민 저항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종만|윤해주|이종목|송병열|이칠기|박용엽|김용봉

[정의]

일제 강점기 일제와 식민지 지주들의 억압과 수탈에 대해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농민 저항 운동.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초반 공황의 여파로 농민들의 경제생활이 열악해지자 전국적으로 대중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예를 들면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 부당 수세 반대 운동, 국유지 부당 불하 반대 투쟁, 호세 연납 및 채권 문서 소작 투쟁, 산림 조합 반대 투쟁, 화전 정리 반대 투쟁, 도로 부역 반대 투쟁, 어업권 탈취 반대 투쟁과 같은 이른바 생존권 옹호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당시 서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과]

1930년대 초반 농업 공황의 여파로 쌀과 누에고치 가격이 폭락하자 서산 지역의 농가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가령 1930년 9월 태안금융조합의 전체 조합원 1,700명 가운데 30%에 해당하는 500여 명의 조합원이 금융 조합으로부터 지불 명령장을 받았으며, 가차압 통지가 발송된 사례만도 417건에 이르렀다는 것은 당시 서산 지역의 경제 사정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가차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부분 논밭에 서 있던 추수 전의 농작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 10월 태안에서는 서산군수가 참여한 가운데 잠업 진흥 대회가 열려 잠견백만석산출기성회가 조직되는 등 대책 없는 잠업 장려 활동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30년 12월 태안면은 이미 받은 잠종 대금을 이중으로 징수하는 횡포까지 부렸다.

1930년대 초반 농업 공황 시기 서산 농민들의 삶은 비참하였다. 농업 공황의 피해가 심각했던 1930년 조사에 따르면, 서산군 총 농가 호수의 66.5%가 춘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서산의 소작 농민들은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가마니를 짜거나, 날품을 팔고, 양돈·양계·양잠 등을 했으며, 바닷가 주민의 경우는 해산물 채취, 제염업 등에 종사하였다. 이 같은 힘든 노동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집계에 따르면 1930년대 초반 서산 지역의 농민들은 평균 84원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이는 충청남도의 평균 66원보다 훨씬 많은 수치였다. 1932년 소고기 600g 값이 28전, 현미(玄米) 상품(上品) 1석(石) 가격이 19.25원이었으므로 이는 상당한 금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자 농민들은 굶주림과 빚에 시달려 정든 고향을 등지거나 빈민으로 희망 없는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기의 농민투쟁]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생존권 옹호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산군의 경우는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농민 조합과 같은 대표 기구가 없었다. 따라서 서산 지역 농민들의 생존권 옹호 투쟁은 비조직적인 형태의 투쟁,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수준의 쟁의나 산발적인 테러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1월 서산 천도교 종리원이 시민 강화회를 열고 물가 감하 운동을 일으킨 것은 이 같은 사정을 극복하기 위한 서산 시민 나름의 자구 노력이었다. 당시 천도교 종리원 측이 당국자와 교섭하여 인하를 요구한 것은 차가(借家)·차지료(借地料), 이발료, 전등료, 운송료, 자동차 운임, 소고기·돼지고기 값 등이었다.

당시 시민 강화회는 교섭 위원 80인을 선출했는데 중심인물은 박용엽(朴容燁), 김용봉(金溶奉), 이민석(李玟錫), 송정선(宋精善) 외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굶주림과 빚은 이런 노력으로 퇴치되지 않았다. 결국 희망을 상실한 농민들은 자포자기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농민들의 주색잡기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공황 직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 등 농민들의 체제 부정적인 변혁 운동이 활성화되자 일제는 1934년 4월 소작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조선농지령[1934]을 발포하여 소작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조선농지령은 미봉적인 조처에 불과하긴 하나 소작 관계 개선에 일정한 효과를 가져왔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에서는 농민회나 농민 조합이 결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초반 소작 쟁의 등 비조직적인 농민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30년대 초반의 농민 투쟁은 농업 공황을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그만큼 1930년대 초반 농민 투쟁은 절박하고 격렬하였다. 서산군의 경우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전개되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공황 피해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생존권 옹호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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