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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종리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846
한자 天道敎宗理院
영어음역 Cheondogyo Jongniw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천도교 사무 행정 기관.

[개설]

천도교 종리원은 제3대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사후 중앙과 지방에 있었던 천도교의 사무 행정 기관이었다.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내포 지역 농민 전쟁의 진원지라 이야기 될 만큼 동학의 교세가 강력한 지역이었으며, 이런 교세는 천도교 창립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말부터 서산 천도교 종리원을 중심으로 왕성한 포교 활동을 펼친 결과 1920년대 초반 서산 지역의 교도 수가 무려 500명~600명에 이르렀다.

[설립 목적]

천도교 종리원은 동학의 교세를 이어 천도교의 포교 활동을 활발히 펼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3·1 운동 이후 천도교 서산교구와 종리원은 지역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7월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 순강단이 서산교구실에서 500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당시 천도교 서산교구장은 이종만(李鍾萬)이었는데, 이종만은 1924년 12월 “공산주의 강령 및 선전문을 휴대했다.”는 혐의로 천도교 청년 당원 박래홍(朴來弘), 조기간(趙基竿)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종만은 1925년 8월 서산노동공제회 강연회에서 ‘노동 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8년 4월 서산노동청년회가 서산 읍내 ‘천도교 교리원’ 내에서 창립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종만은 1928년 7월~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 서산지국장을 역임하면서 지역 사회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1928년 11월 4일 서산에 천도교 충남연합 포덕대[강사 정환석과 마기상]가 서산읍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려 하자 경찰이 집회를 금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31년 1월 서산 천도교 종리원은 여러 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물가 인하를 요구하는 시민강좌회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천도교 종리원 측이 당국자와 교섭하여 인하를 요구한 것은 차가료(借家料)·차지료(借地料), 이발료, 전등료, 운송료, 자동차 운임, 쇠고기 값·돼지고기 값 등이었다.

한편 충청남도 서산 등 내포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3·1 운동이 활발했는데, 그 이유는 천도교의 교세가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서산 지역 3·1 운동을 주도한 것도 천도교도들이었으며 3월 16일에 일어난 서산 읍내 시위 등 여러 시위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천도교의 신구파가 갈등하는 과정에서 교세가 약화되어 일제 강점기 내내 구파 신도는 150명, 신파 신도는 60~70여 명 선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서산 지역에 천도교 구파가 강력했던 것은 구파계 중심인물인 이종린(李鍾麟), 이종일(李鍾一)[1858~1925] 등이 서산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3·1 운동 시기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묵암 이종일은 서산 지역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다양한 방면에서 서산 지역 천도교도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의와 평가]

서산 지역의 강성한 천도교도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천도교 종리원을 중심으로 각종 지역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 직후 천도교 교인 이종만이 서산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것, 그리고 1948년 제헌 의회 선거에서 이종린이 당선된 것 등도 모두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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