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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20
한자 平薪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701년연표보기 - 항금산 아래 설치
개정 시기/일시 1711년연표보기 - 망일산 아래로 이전
개정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삼길산 아래로 이전
관할 지역 평신진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반곡마을에 설치되었던 진(鎭).

[개설]

평신진(平薪鎭)은 1711년(숙종 37)~1895년(고종 32)에 충청도 북서부 해안을 수호한 진으로, 종3품의 첨사가 관할하였다. 또한 평신진은 목장까지 관리하는 겸목관 체제를 채택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 더욱이 서산과 태안 지역은 세곡미 등 각종 물자를 운송하는 조운의 주요 경유지로, 양선(糧船)의 보호는 평신진의 주요 임무였다. 양선의 호송 구역은 안흥에서 경기도 풍도까지였다. 이 외에도 평신진에서는 도서 지방의 수색 정찰과 금산(禁山)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866년(고종 3) 2월 11일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탄 로나호가 평신진의 이도면 영전리 조도 앞바다에 몰래 정박하자, 당시 평신첨사 김영준과 해미현감 김응집 등이 쫓아 보낸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평신진의 첨사는 감목관과 겸직하여 목장(牧場)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변천]

조선 후기 영조부터 헌종 연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 중 「평신진지(平薪鎭誌)」를 살펴보면 평신진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위치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1701년(숙종 27)에는 대산읍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항금산(亢金山) 아래에 설치되어 약 10년간 운영되다가 망일산(望日山) 아래로 옮겨졌다.

이후 1772년(영조 48)에 다시 삼길산(三吉山) 아래로 옮겼다. 망일산 아래가 바로 대산읍 내 구진(舊鎭)이며, 삼길산 아래가 지금의 대산읍 화곡리 평신진 터이다. 평신진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과 육로 수송의 발달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건물과 토지는 개인에게 매매되어 성터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대산읍사무소에서 남서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50m 정도 가면 좌측에 샛길이 있는데, 이 길로 다시 100m 정도 가면 산으로 오르는 방향에 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평신진 터이다. 소로 입구에 진터임을 알리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옛 평신진 터는 밭으로 개간되고 인근에는 아파트 등이 건축되어 이곳이 진터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평신진의 권역으로 보이는 면적은 약 330㎡이며, 기와편만이 소량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평신진은 조선 후기 삼남 지방의 원활한 양곡 수송과 왜구 방어를 관장하던 거점 진지였다. 평신진 관련 사료와 연구 자료를 통해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양곡의 수송 방식, 군사 제도, 감목관의 역할, 그리고 이양선 출몰과 대처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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