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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운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02
한자 掘浦運河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오송리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윤용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준공 시기/일시 1134년 7월연표보기 - 굴포운하 굴착 시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391년연표보기 - 공사 재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412년연표보기 - 공사 재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 안민창 설치
성격 운하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에 있었던 운하.

[건립 경위]

고려에서 조선까지 수도가 개성과 한양에 설정됨에 따라 서해 연안 해로의 운송로 기능은 극대화되었다. 당시 세곡과 각종 공납품의 가장 중요한 공급지는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 지방로서 물류의 대부분이 태안반도 연안을 경유하여 개성 혹은 한양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 조운의 과정에서 태안반도 안흥진 앞의 안흥량은 전라 울돌목[鳴梁], 강화의 손돌목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위험 지역으로 해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운하를 개착하게 되었다.

[변천]

고려 숙종[1096년~1105년], 예종[1106년~1122년] 연간에 운하 개착의 논의와 시도가 있었으나 운하의 개착 시도가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1134년(인종 12) 7월의 일이다. 인종정습명(鄭襲明)을 파견하여 태안 및 인근 지역에서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운하를 파게 하였으나 암반이 물 밑에 있고 또 조수가 왕래하므로 파면 파는 대로 메워져 공사하기가 쉽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 왕강(王康)의 건의에 따라 굴포운하 개착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1412년(태종 12)에 다시 운하 건설이 논의되었다. 하륜(河崙)의 건의로 종래의 관류식(貫流式)과 다른 일종의 갑문식(閘門式) 형태를 채택하여 1413년(태종 13) 1월에 착공하였다. 병조 참의 우부(禹傅)와 의정부 지인 김지순(金之純)의 감역 하에 인근 주민 5000명이 동원된 이 공사는 1413년 2월에 종료되었다. 1413년(태종 13) 완공된 이 태안조거(泰安漕渠)는 공사의 난관이 되었던 12㎞ 가량의 고지대 안부(鞍部)를 중심으로 남쪽 3개 처와 북쪽의 2개 처의 저수지를 계단식으로 조성하여 물길을 연결하는 일종의 갑문식으로 처리함으로써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소규모의 용선(用船) 능력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일부 구간은 소선 한 척이 겨우 다닐 정도이며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하여 실제 통선 가능 일수도 많지 않아 실제 그 기능이 미흡하였다.

굴포운하 개착 문제는 조선 현종 대에 이르러 논의가 재연되어 송시열(宋時烈)은 이른바 설창육수(設倉陸輸) 안을 제안하였다. 천수만 쪽 옛 순성(蓴城) 근처에 조선(漕船)을 정박시킨 다음 여기에서 조미(漕米)를 가로림만영풍창(永豊倉) 옛터까지 육수(陸輸), 그리고 다시 선박으로 옮겨 실어 경창(京倉)으로 가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순성과 영풍창 옛 터 두 곳에 창고가 필요했다. 1669년(현종 10) 설창육수를 위해 안민창(安民倉)이 설치되지만 이 방안도 실제 번거롭기에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현황]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간 약 7㎞에 달하는 운하 유적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이고 제일 높은 곳은 50m이다.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지 않고, 훼손이 진행 중이며 자연 하천, 논밭 등의 경작지로 되어 있는 부분도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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