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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08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2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6년 11월 6일 - 사적 제475호로 지정
소재지 서산 부장리 고분군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2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발굴 조사된 백제 시대 지방 세력의 고분군.

[개설]

서산 부장리 고분군(瑞山副長里古墳群)은 2004~2005년에 이루어진 임대 아파트 조성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2006년 11월 6일 사적 제47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사적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적 제475호로 지정된 지역은 보존되어 있지만, 나머지 범위에 대해서는 아파트 개발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위치 및 입지]

서산 지역은 동쪽 외곽의 가야산 산지에서 서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듯이 형성된 구릉 지대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으로, 대부분 높이 50m 내외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 100m 이상의 산지는 서산 동부의 가야산 산지와 읍내 북부의 성황산~부춘산~팔봉산을 잇는 산지 등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또한 서산은 해안선이 길고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얕은 바다와 접해 있어 풍부한 수산 자원은 물론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한 지역이다. 반면에 하천은 큰 규모의 하천 발달은 미약하고 작은 하천이 발달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인류의 생활 환경 조성에 매우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서산시의 동북쪽으로 약 6.5㎞ 거리에 위치하는데, 지형상으로는 서산시의 동쪽 외곽에 남북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가야산 줄기의 서쪽에 해당한다.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분지되어 흘러내린 가지 능선의 정상부에 해당하며, 유적은 높이 35~55m의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로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으로는 저구릉성 산지와 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대교천과 덕수천이 인접하여 흐르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효창종합건설(孝昌綜合建設)에서 시행하는 서산시 음암면 임대 아파트 신축 공사 부지에 대한 개발에 앞서 매장 문화재 발굴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조사 경과를 살펴보면, 2003년 6월 지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청동기 시대와 백제 시대 토기편들이 다수 수습되어 유적의 존재 가능성이 추정되었다. 이에 2003년 8월부터 동년 12월의 기간 중에 시굴 조사를 진행하여 청동기 시대 취락 유적과 백제 시대 매장 유적 및 취락 유적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 2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1차 조사는 2004년 3월 22일부터 그해 12월 20일까지 실시되었으며, 2차 조사는 2005년 9월 5일부터 동년 12월 9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전체 조사 면적 약 4만 2,900㎡의 범위에서 약 260여 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조사된 유구는 청동기 시대와 초기 국가 시대~백제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로 구분된다. 청동기 시대 유적은 주거지 34기, 수혈 유구 8기, 초기 국가 시대~백제 시대 유적은 주거지 44기, 수혈 유구 15기, 분구묘(墳丘墓) 13기, 석곽묘 3기, 조선 시대 유적은 주거지 8기, 수혈 유구 2기, 토광묘(土壙墓)와 회곽묘 87기, 시대 미상 수혈 유구 29기 등이 조사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구는 총 42기가 조사되었는데, 8기의 수혈 유구를 제외하면 34기가 모두 주거지에 해당한다. 유구는 구릉 능선 상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방형·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장방형 주거지가 30기로 중심을 이룬다. 장방형 주거지는 내부에 무시설식 토광형 노지가 설치된 ‘역삼동·흔암리 유형’에 해당하는 주거지로 청동기 시대 전·중기의 문화상으로 이해되며, 출토 유물은 공열 토기, 구순각목문 토기, 이중구연단사성문+구순각목 공열 토기가 확인된다. 평면 방형·원형 주거지는 타원형 구덩이와 그 양단에 주공이 위치하는 소위 ‘송국리형 주거지’로 청동기 시대 후기로 편년된다.

백제 시대 유구로는 주거지와 분구묘가 조사되었는데, 주거지는 주로 Ⅰ지역에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주 능선의 중앙 남사면을 이용하고 있어, 서쪽 능선부와 경사면에 위치한 분구묘의 배치와 구분되는 양상이다. 조선 시대 유구는 분묘 유적이 중심을 이룬다. 이 가운데 서산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는 백제 시대 분구묘를 들 수 있다.

[백제 분구묘 조사 내용]

백제 시대 분구묘는 모두 13기가 조사되었는데,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서 남쪽과 서쪽의 경사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형상이다. 구릉 정상부에 있는 1호 분구묘를 기준으로 하여 남쪽으로 2·3·13호 분구묘가 자리하고 있고, 4~12호는 그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분구묘의 주변으로는 한 변의 길이가 20~40m 정도에 이르는 방형의 주구가 돌려져 있다. 주구는 6·8·9호의 주구가 일부 중복된 것 이외에 묘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고 한곳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매장 주체 시설은 모두 토광묘로 확인되며, 목관묘가 대부분이나 일부 옹관묘도 확인된다. 하나의 분구에 매장 주체부가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10여 기가 확인되었다. 다장으로 조성된 분구는 수평적 혹은 수직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7호 분구묘의 경우 후행하는 매장 시설이 선행의 매장 시설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매장 주체 시설은 조성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는데, 말각 장방형으로 토광을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흙을 성토하여 완성하는 형식과 성토된 분구를 다시 수직으로 굴광하고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구분된다. 장축 방향은 6호분의 경우 모두 남북 방향이지만, 7호분의 경우는 제각각이어서 일정한 정형성을 찾기는 어렵다. 금동 관모가 출토된 5호 분구묘는 생토면을 장방형으로 파고 그 안에 목곽과 목관을 갖춘 토광묘 1기를 축조한 후 성토하여 완성한 형태로, 다른 분구묘와 달리 매장 주체부가 1기만 있는 단독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출토 유물은 크게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로 구분할 수 있다. 토기류는 한성 양식의 직구 단경호와 광구 장경호, 광구 원저호, 원저호, 단경호, 장동호, 병형 토기, 완, 장란형 토기, 심발 등이 있다. 철기류는 환두 대도를 비롯하여 철부, 철겸, 철도자, 철도 등이 확인되었다. 장신구류로는 구슬, 이식 등이 있는데, 특히 위세품(威勢品)으로 살필 수 있는 금동 관모, 철제 초두, 은상감 환두 대도 등 최고의 위계를 대변하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부장리 세력의 위상을 보여 준다.

그동안 백제 유적의 금동 관모는 서산 부장리 분구묘에서 출토된 예와 같이 다양한 지방 사회(地方社會)의 묘제에서 출토되었다. 대표 유적으로는 나주 신촌리 옹관묘와 익산 입점리 석실분,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횡혈식석실분, 전라남도 고흥 길두리 석곽묘 등이 있다.

서산 부장리 유적의 5호 분구묘에서 출토된 금동 관모는 청동의 바탕 재료에 금을 입혀 만들었으며, 반원형에 가까운 내관을 중심으로 전면과 후면에 입식을 세우고 하단부에 테를 돌려 끼웠다. 관모 내측에는 백화수피제 내관이 들어 있는데, 하단부 일부에 손상이 있으나 거의 원형에 가깝다. 관모의 양 측판 문양은 전체적으로 투조문과 조금문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여러 개의 육각형 구획 안에 용과 봉황을 투조한 것으로 보인다. 측판의 중앙에만 용을 하나 배치하고 그 주변의 육각형 안에는 봉황을 배치한 것으로 살펴진다. 내관과 전·후식에 모두 달개가 매달려 있거나 매달았던 흔적들이 확인된다.

환두 대도는 소환두 대도와 더불어 다양한 장식 대도가 있는데, 서산 부장리 유적에서는 4~8·10·12호 분구묘에서 환두 대도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5호분과 7호분, 그리고 12호분에서는 삼엽 환두 대도가 출토되었다. 모두 철제의 타원형 원환 내에 삼엽을 장식한 것으로, 7호 분구묘의 것은 삼엽이 상대적으로 크고 잎의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비하여 5호와 12호의 것은 크기도 작고 끝도 뭉툭하게 처리되어 있다. 또한 7호와 8호 분구묘의 환두 대도는 환두부에 당초문의 은상감이 시문되어 있다.

[백제왕의 권한을 대행하다]

최근 서산 지방에서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 기지리 유적(機池里遺蹟), 언암리 유적(堰岩里遺蹟), 여미리 유적(余美里遺蹟), 예천동 유적(禮川洞遺蹟) 등에서 한성 백제기로 편년할 수 있는 4~5세기 대의 분구묘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한성 백제기 지방 사회의 묘제 현황을 살펴보면, 한강 이남의 안성천 수계와 곡교천·금강 유역권에서는 주구 토광묘와 토광묘, 수혈식 석곽묘, 횡혈식 석실분이 넓게 분포하지만, 서산 지역을 포함한 서해안 지역에서는 분구묘가 집중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포상에서 나타나듯이 한성 백제기 묘제를 중심으로 각각의 지역별 특징을 구분할 수 있다.

서산 지역 일대에서 확인된 한성기 지방 사회의 묘제는 토광묘와 분구묘로 정리될 수 있다. 특히 최근에 서산 부장리 고분군을 포함하여 기지리 유적, 언암리 유적, 예천동 유적 등지에서 분구묘가 매우 밀집된 형태로 확인되고 있다.

그동안 서해안 지역에서 확인된 분구묘 관련 유적은 보령 관창리 유적(保寧寬倉里遺蹟), 서천 당정리 유적과 금강 이남의 호남 지방에서 확인되는 고분 문화와 함께 마한 재지 양식의 분구묘 분포권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구묘의 조영은 마한 관련 시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산 부장리 고분군기지리 유적에서와 같이 4~5세기 대 백제 관련 유물이 적극적으로 출토되는 단계에서도 지방의 고유 묘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환두 대도는 한성기 백제 지방 사회에서 확인되는 최고의 위세품으로, 피장자의 사회적 성격과 권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유물로 주목되고 있다. 부장리 5호 분구묘에서 출토된 금동 관모는 4~5세기 대 백제 지방 사회의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자료로, 천안 용원리 유적과 더불어 공주 수촌리 고분군(公州水村里古墳群), 익산 입점리 고분(益山笠店里古墳), 나주 신촌리 고분,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도 백제 시대 금동 관모가 출토된 바 있다.

금동 관모는 세부 제작 기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고깔 모양의 형태와 뒷면에 수발이 달린 장식의 존재에 있어서는 형태상 공통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각 지역에서 자체 제작하였다기보다는 백제 중앙에서 일괄 사여(賜與)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금동 관모나 장식 대도와 같은 위세품적 성격이 강한 유물은 중앙에서 하사된 물품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세품의 사여 체제에 관하여, 백제 왕실 혹은 중앙 세력이 필요에 따라 지방 세력들에게 위세품을 적절히 하사함으로써 재지 세력의 이탈을 막고 그들을 매개로 거점 지역을 지배하고자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백제가 연맹 왕국 최고의 수장으로서 대외 교섭권을 독점한 상태에서 지방 세력에 대한 위세품의 사여가 이루어진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금동 관모가 출토된 고분은 모두 유적군 내에서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묘제는 각각 지방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재지 묘제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와 같이 위세품과 더불어 한성 양식의 토기 문화가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지방 사회에서 각각의 독자적인 묘제를 조영하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 중앙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 관계 여부를 떠나서 백제 지방 사회의 문화적 독자성과 다양성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산 부장리 세력은 무덤의 규모와 출토 유물로 보아 4~5세기 대 서산 지역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있던 수장층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다. 이들 세력은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백제 중앙과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장하여 5세기 대에는 서산 지방 일대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들은 백제 중앙과의 관계 형성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점유하면서 백제의 선진 문물과 위세품을 사여받고, 이를 기초로 하여 주변의 기지리, 언암리, 예천동 등지에 존재하는 재지 세력에게 재분함으로써 지방 사회의 계층화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분구묘라는 특징적인 무덤이 조사된 유적으로서 4~5세기 대 백제 지방 사회의 독자적인 묘제상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더불어 출토 유물의 상당수가 한성 양식의 토기와 위세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성 백제 중앙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출토 유물 가운데 5호 분구묘에서 확인된 금동 관모는 천안·공주·익산·고흥 지역을 비롯한 백제 지방 사회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위세품으로, 한성 백제의 지방 통치 체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즉 백제의 중앙은 위세품의 사여를 통하여 지방 세력을 중앙의 지배 체제 안으로 포용하고, 이를 통하여 지방 사회에 대한 계층화를 유도함으로써 일원화된 지배 체제를 구축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위세품의 부장과 더불어 확인되는 묘제의 전통성은 백제 중앙에 의한 일방적인 문화 전파와 같은 영향보다는 지방 사회의 적극적인 문화 수용 가능성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재지 묘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백제 중앙으로부터 위세품과 다양한 유물을 수용한 지방 사회는, 재지 문화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백제 중앙과 다원적(多元的)이고 능동적(能動的)인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분구묘에서 확인되는 금동 관모와 환두 대도, 이식 등의 유물이 4~5세기 대 한성 백제의 지방 사회에서 확인되는 최상급의 위세품임을 감안하면, 이들 유물들은 한성 백제기 서산 지방의 문화적 성격과 백제 중앙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