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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851
한자 六二五戰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북한군 침공
발단 시기/일시 1950년 7월 9일연표보기 - 인민군 제6보병 사단 천안 지역에 도착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2일연표보기 - 인민군 제6보병 사단 제13보병 연대, 서해 연안을 따라 서산 통과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9일연표보기 - 서산 경찰 보도 연맹원, 요주의·요시찰인 학살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2일연표보기 - 서산 경찰 보도 연맹원, 요주의·요시찰인 학살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8일연표보기 - 인민군 3개 연대 서산군 주둔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30일연표보기 - 인민군 3개 연대 서산군 주둔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30일 경연표보기 - 인민군과 지방 좌익세력 우익 인사 집단 학살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0월연표보기 -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2월연표보기 -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 종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방호산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으로 충청남도 서산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 전쟁 초기 미군과 인민군의 전투는 주로 경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서산군에서는 전투와 관련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산 사람들이 전쟁의 와중에 목숨을 잃거나 이산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산 지역에서도 개전 초기의 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 인민군 점령 시기의 우익 인사 학살 사건, 수복 직후의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 등이 일어났다.

[경과]

한강 도하 이후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 제6보병 사단은 1950년 7월 9일 천안 서북 지역에 도착하였다. 7월 11일경부터 제6보병 사단의 1개 연대가 포병 연대 예하의 1개 포병 대대와 합동으로 서해 연안을 따라 군산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제6보병 사단 주력은 7월 12일 아침 공주 유구리에 도달하였으며, 제13보병 연대는 서해 연안을 따라 서산, 홍성 방면으로 남하하여 서산, 홍성, 공주 방면을 통과하였다. 인민군 제6사단은 중공군 제166사단을 전환하여 편성한 사단으로, 사단장은 방호산(方虎山)[본명은 이천부(李天富)]이었다.

인민군이 서산·홍성 방면으로 남진하자 서산 경찰은 예산 지역의 경찰과 함께 신창 등지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서산과 태안 경찰은 7월 12일경 해당 지역의 모든 공공 기관을 소개한 뒤 철수하였다. 서산 경찰이 전쟁 직후부터 군 경찰서나 면 지서에 예비 검속을 해 두었던 보도 연맹원이나 요주의·요시찰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산 경찰이 성연면 일람리[메지골] 등지에서 보도 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퇴각 직전인 7월 9일부터 12일 사이였다.

서산군의 경우 1950년 7월 18일부터 9월 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군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인민 공화국 시기, 서산군에도 정치 보위국의 지휘하에서 군 내무서, 면 분주소, 리 자위대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50년 9월 중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서산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도 인민군 전선 사령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1950월 9월 30일경부터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태안 지역에 미군들이 함포 사격을 하면서 근흥면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고 전한다. 인민군 전선 사령부[혹은 노동당]는 후퇴 시기 각 지역으로 정치 공작원을 파견하여 조직적으로 퇴각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때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은 서산 양대리와 소탐산 등지에서 내무서나 분주소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우익 인사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산군이 수복되자 서산 지역의 우익 청년[의용 경찰, 의용 소방대, 대한청년단]들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치안대를 조직한 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부역자들을 무단으로 색출하여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제9사단의 비호 아래 서산 지역에 경찰이 들어온 것은 1950년 10월 8일 경이었다.

하지만 부역 혐의자에 대한 사사로운 학살은 경찰 진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 등에 의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2,000여 명 이상의 부역 혐의자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결과]

서산에서는 전투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 크게 세 차례의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세 차례의 학살 사건을 통해 큰 피해를 본 것은 좌우익에 관계없이 정치에 앞장섰던 일종의 ‘명망가’들이었다. 이 같은 학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쟁 이후 서산 지역에는 급속히 정치 냉소주의나 허무주의가 팽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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