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913
한자 烈女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이춘진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열녀(烈女)와 열부(烈婦).

[개설]

전통적으로 열녀란 남편이 죽어서 개가할 수 있는데도 개가하지 않는 여인을 뜻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주로 상층 지식인들이 엮은 한문본 『열녀전(烈女傳)』에는 대체로 남편을 따라 죽은 소위 종사(從死) 여인들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어, 결과적으로 열(烈)과 죽음을 밀접하게 연계시키는 관습을 만들었다.

열녀 개념의 변모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 나온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열녀」 편에는 도미의 처가 수록되어 삼국 시대의 열녀 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열전」 열녀 편에는 열녀란 변고를 만나 훼절(毁節)의 위험을 당하게 될 때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여인이란 개념임을 분명하게 기술하여 그 개념의 변모가 드러난다.

열녀 개념의 변모는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나라의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자결하거나 피살된 여인들이 많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거니와, 이 시기 배 열부, 최 열부 등의 열부(烈婦)란 명칭이 자주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사』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열녀」 편에는 전통적 개념의 열녀와 변모된 개념의 열녀가 뒤섞여 나타난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아내가 따라 죽고 나면 시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양육할 사람이 없어지므로 그 소임을 다 마치고 아이들이 장성한 뒤에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열녀의 전형이라고 권장한 사례도 있다.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열행(烈行)으로 기록된 열녀로는 이검손(李儉孫)덕비(德妃), 이희석(李希石)막개(寞介), 홍종학(洪鍾鶴)창원 황씨(昌原黃氏), 최호문(崔鎬文)나주 정씨(羅州丁氏), 장기덕(張基德)창녕 성씨(昌寧姓氏), 유동원(柳東源)밀양 손씨(密陽孫氏) 등 6명이다.

[서산의 열녀]

1. 이검손덕비

덕비이검손의 아내가 되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25세에 남편을 잃자 밤낮으로 시신을 베고 곡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 이웃 남자가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자 하자 정조를 더럽힐까 자결하려고 하였는데, 마을 사람이 말려 살아남았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그녀를 공경하였다고 한다. 『호산록(湖山錄)』덕비의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2. 이희석막개

막개이희석의 아내로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삼년상을 잘 치렀다. 그리고 평생 남자와 소통하지 않고 몸가짐을 엄하게 하여 수절하니 주위에서 열녀로 칭송하였다. 『호산록』막개의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3. 홍종학창원 황씨

창원 황씨는 홍성군에서 황민수(黃敏洙)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당진의 석문면 삼봉리에 사는 홍종학과 혼인하였다. 2년 만에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치른 후 독약을 먹고 자진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해미, 홍주, 덕산, 부여, 청양, 보령, 결성 지역 유림이 상소를 올려 1904년(고종 41) 명정(銘旌)이 내려졌다. 현재 서산시 음암면 신장1리에 있는 홍종학 처 창원 황씨 정려는 원래 석문면 삼봉리에 건립되었다가 후손이 이주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4. 최호문나주 정씨

나주 정씨는 효자 최호주(崔鎬周)의 형인 최호문의 아내이다. 남편 최호문이 병에 걸리자 지성으로 간병하여 완쾌되었으나 3년 뒤에 다시 위독해지자 나주 정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간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나주 정씨의 열행이 널리 알려져 1920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5. 장기덕창녕 성씨

열녀 창녕 성씨팔봉면 호리에 살고 있는 장기덕에게 시집와 살다가 1933년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었다. 전언에 의하면 창녕 성씨의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온 집안사람이 모였는데, 창녕 성씨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이미 목숨을 끊은 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성균관(成均館)에서 표정(表旌)하였고,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34년 서산시 팔봉면 호리창녕 성씨 정려를 건립하였다.

6. 유동원밀양 손씨

밀양 손씨와 남편 유동원은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자신들이 대신 병을 앓게 해 달라며 진심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를 간병하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아 변을 맛보아 가면서까지 병의 위중을 가늠하였다. 그러나 밀양 손씨 부부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죽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이후 부부의 효행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그동안 정려를 건립하지 못하다가 후손과 지역 유림의 노력으로 1981년 서산시 부석면 지산2리 지파동마을유동원·효부 밀양 손씨 정려를 건립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