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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819
한자 趙雅
영어음역 Jo A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08년연표보기 - 아버지 조호가 ‘우정승 이무(李茂)는 용모가 아름다워 임금이 될 만하다’는 망언을 한 죄로 옥사할 때 조아 자신도 귀양감
활동 시기/일시 1411년연표보기 - 죄를 용서 받아 관직에 나아갔고 벼슬이 사인에 이름
유배|이배지 서산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평양
대표 관직 사인(舍人)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서산 지역에 평양 조씨가 이거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인물.

[가계]

본관은 평양. 정숙공 조인규(趙人規)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조호(趙瑚)[?~1410]이다. 조아(趙雅)의 후손으로는 『여지도서(與地圖書)』와 1927년에 발간된 『서산군지(瑞山郡誌)』에 그 행적이 기록 된 조후윤(趙後尹)·조후량(趙後亮) 형제가 있다. 조후윤은 선전관으로 병자호란에 참여하였다 전사하였고, 조후량 역시 병자호란 당시 병사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활동 사항]

조아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일대에 거주하는 평양 조씨들이 서산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조아의 아버지 조호는 1408년(태종 8)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집에서 김첨(金瞻), 허응(許應), 박돈지(朴惇之) 등과 붕당을 조장하였다고 하여 귀양 갔다가, ‘우정승 이무(李茂)는 용모가 아름다워 임금이 될 만하다’는 망언을 한 죄까지 추가되어 옥사하였다. 이 때 조호의 아들 조아마저 귀양을 가는 등 당시 평양 조씨 일가가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조아는 1411년(태종 11)에 죄를 용서 받아 관직에 나아갔고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관직에 있으면서 임금과 자주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이때도 정사를 논하던 중 왕의 뜻에 거슬려 서산[현 태안군 지역]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유배가 풀린 후에도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배지였던 서산을 일컬으면서 “나라가 어지러우니 잠시 내려가 살다가 태평성대가 오거든 다시 돌아오라”고 권유하였고, 이 말이 유언으로 남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아 사후 1479년(성종 10) 폐비 윤씨의 사사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조아의 둘째 아들 조계종(趙季宗)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고자 형의 아들들과 자신의 식구들과 함께 옛 서산군 원북면 대기리와 반계리[현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와 반계리] 일대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이후 조계종의 후손들이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일대로까지 퍼져나가 부석파 혹은 교리공파로 불리며 세거하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 특정 가문의 입향 유래를 구체적인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특이한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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