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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령청년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57
한자 瑞寧靑年會
영어음역 Seoryeongcheongnyeonhoe
영어의미역 Seoryeong Young Men´s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4년 4월연표보기 - 서령청년회 조직
개칭 시기/일시 1927년 10월연표보기 - 서령청년회에서 서산청년동맹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1월연표보기 - 서령소년회 조직
성격 청년 운동 단체

[정의]

1924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

[개설]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최초로 조직된 청년회는 1920년 서산 지역 청년들이 조직한 서산청년회였다. 서산청년회를 뒤이어 서산 지역의 청년 활동을 이끈 조직이 바로 서령청년회였다. 창립 당시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서산청년회가 온존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서령청년회’라 이름하였다.

[변천]

서산청년회가 유명무실해지자 1924년 4월 안병삼(安秉三), 전영석(田泳奭) 등 서산 지역의 청년 유지 69명이 서령청년회를 조직하여 지역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 서령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은 근대 교육도 받고 재산도 제법 많은 유지 청년들이었다. 창립 당시 서령청년회의 조직 목적은 소년들의 지덕체(智德體)를 기르고 잡지를 구독하는 것이었다. 입회비는 1인당 20전, 회비는 매월 5전이었다. 서령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은 청년회 창립 직전 시기인 1924년 1월 조철호(趙喆鎬), 김제능(金濟能) 등의 발기로 서령소년회도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 서령소년회의 회원은 70여 명, 조직 목적은 지덕체의 함양이었다.

1927년 10월에 열린 청년회 ‘혁신 총회’를 계기로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점차 좌익 성향의 청년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였다. 서령청년회는 혁신 총회를 통해 조직 명칭을 서산청년동맹으로 바꾸고 조선청년총동맹의 강령을 전격적으로 수용하였다. 1924년에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의 강령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 “조선 민중 해방 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함” 등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서령청년회는 1925년 서산농회의 특별 위원이었던 이천구(李天求) 회장을 중심으로 서산 읍내 유지들의 협조하에서 노동 야학을 운영하였다. 또한 지역 유지들의 칭송과 함께 1926년 3월 회원들의 출역으로 흑송 묘포(黑松 苗圃)를 운영해 활동 기금과 노동 야학 기금 마련을 위한 노력도 하였다.

당시 기금 마련 회의의 결의 사항은 “① 지식 계급의 청년으로부터 노동을 솔선실행하야 일반 청년에게 근로의 미풍을 장려할 사(事), ② 동회의 재산은 가급적 회원 자체의 ‘땀’으로써 노동한 결과를 축적하야 기본 재산으로 할 사” 등이었다. 하지만 혁신 운동 이후 경찰의 탄압으로 활발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의의와 평가]

서령청년회서산청년회의 뒤를 이어 서산 지역의 청년 활동을 이끌었는데 서산청년회보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다. 이후 서령청년회가 서산청년동맹으로 명칭을 바꾼 뒤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점차 좌익적 성향을 띄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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