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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유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30
한자 韓慶裕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17년연표보기 - 한경유 사건 발발
성격 전패 도난 사건
관련 인물/단체 한경유

[정의]

1817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일어난 전패(殿牌) 도난 사건.

[개설]

1817년(순조 17) 서산에서 전패(殿牌)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처분이 『순조실록(純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전패는 모든 군현의 객사에 보관되는 임금을 상징하는 물건이므로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으므로 이것을 훔쳤다는 것은 역모의 혐의를 받을 만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이 매우 단편적인 까닭에 이 사건이 벌어진 정확한 일시를 알기는 어렵다. 승지 김이교(金履喬)의 상소에 의하면 서산에서 전패가 도난당했고 그 범인은 한경유(韓慶裕)로 밝혀졌는데, 죄수가 충청감영의 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충청도에서 형을 집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인 오류로 승정원과 의정부에서 이미 일을 처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서산 사람 한경유가 무슨 이유인지 전패를 훔쳤고, 범인으로 발각되기 전에 스스로 전패를 종이에 싸들고 출두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조정에서는 한경유가 실성한 사람인 듯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이 점을 감안하여 과하지 않은 형벌을 내리도록 조치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시대에 지역 사회가 혼란하고 수령과 사족[유림] 간의 갈등이 벌어지면 전패 도난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불만을 가진 지역민이 전패를 파괴하거나 훔쳐내 고을 수령 또는 적대시하는 사족 집단이 형벌을 받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전패는 관리에 문제가 생길 경우 해당 고을이 폐현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조선 중기에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자,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수령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고의로 일으킨 일이라 하여 사건의 주모자를 찾아내 처벌하였다. 그러나 서산의 한경유 사건은 시대적으로 볼 때 딱히 그와 같은 해석을 내리기 어렵다.

[경과]

서산 사람 한경유가 고을의 전패를 훔쳤고, 후에 스스로 그것을 종이에 싼 채 관아에 출두하여 자수하였다. 따라서 충청감영에 갇혔고 그곳에서 처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에서는 조보(朝報)에 기록하고, 의금부에서는 중죄인을 극형에 처한 후 그 처자식까지 연죄시켜 같은 형벌을 내리도록 조치를 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행정적인 문제이므로 조정에서 논의가 이루어져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결과]

전패를 훔친 후 직접 그것을 싸들고 나타난 한경유는 일반적으로 전패의 변을 일으킨 자에게 내려지던 엄중한 처벌은 피한 듯하다. 다만 실성한 자의 짓으로 정리하여 목숨을 건졌다.

[의의와 평가]

1800년대 초반 지역 사회의 혼란한 분위기를 반증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한경유 사건과 관련지을 만한 지역 사회의 문제점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어 상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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