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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16
한자 瑞山鄕校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06년연표보기 - 창건 추정
이전 시기/일시 1574년연표보기 - 군수 최여림이 서산향교를 성문 밖에서 서산시 동문동으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 대성전 중수(1648)
개축|증축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 대성전 중수(1669)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대원군의 향교 운영 쇄신 정책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23일연표보기 - 충청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4월 10일연표보기 - 서산향교 내에 있는 은행나무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3호로 지정
현 소재지 서산향교 -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동문동 580]지도보기
원소재지 서산향교 - 성의 서문 밖
성격 향교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대성전]
측면 칸수 3칸[대성전]
소유자 충남향교재단
관리자 서산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116호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

[위치]

서산시청에서 서산시 온석동 방향으로 난 지방도 649호선을 따라 700m 정도 들어가다 보면 향교골이 보인다. 향교골로 난 골목길을 따라 250m 정도 더 들어가면 옥녀봉성왕산 자락이 만나 배산을 형성하는 곳이 있는데, 서산향교(瑞山鄕校)는 이곳에 동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변천]

서산향교는 조선 시대 서산 지역에서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지방 교육 기관이다. 1406년(태종 6)에 창건된 것으로 구전되는데,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서산향교의 창건과 이건에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자료가 일부 전해지는데, 1415년(태종 15) 유백유(柳伯濡)가 찬한 서산향교 창건시가 그것이다. 서산향교 창건시에서 군수 조종생(趙從生) 재임 시절[재임 1412~1415] 격식을 갖춘 향교가 건립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향교의 위치가 군 치소를 중심으로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원래 성의 서문 밖에 있었던 것을 1574년(선조 7) 당시 군수였던 최여림(崔汝霖)이 서산시 동문동으로 이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향교가 군에서 서쪽으로 1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건 당시의 사정은 1648년(인조 26) 또 다시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던 중 발견된 옛 상량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상량문에는 “향교 창건 시 지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성 동쪽 평탄지이자 가까운 곳을 버리고 북쪽의 경사지에 멀리 떨어진 곳을 택한 잘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산록(湖山錄)』의 향교조에서도 한영희(韓永禧)를 주도로 한 서산 사림들의 수차례 이건 요청을 통하여 서산향교 이건이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김호윤(金好尹), 김호열(金好說), 박영언, 이유인(李惟仁), 유창수, 문성해, 이첨수 등이 협력하였고, 특히 군수로 부임한 최여림이 적극적으로 지원, 협조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수 이유록(李綏祿)의 부임 기간 중에 서산향교의 모습이 일신되었고, 1648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한 차례의 이건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건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수만이 허락되어 일단락되었다.

1669년(현종 10)에 재차 대성전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들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서산향교의 중수와 관련하여 19세기 이후에는 부족한 재력을 감당하기 위해 물자를 모으는 노력들도 이어졌다. 한편 1872년(고종 9)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흥학과 향교 운영 쇄신 정책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일제 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수와 보수가 이루어졌다.

[형태]

대성전과 명륜당(明倫堂) 등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경사진 대지를 2단으로 정리하고 전면에 명륜당을, 후면에 대성전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은 남아 있지 않고 길과 담을 경계로 영역을 만들고 있다.

전면의 명륜당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서 길게 이어지면서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어 명륜당 뒤쪽의 대성전 담과 함께 폐쇄된 마당이 만들어진다. 명륜당은 뒷마당에 붙여서 높은 석축과 계단이 있고 계단 상부에 내삼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내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배치되어 있다. 동무와 서무의 위치가 대성전 쪽에 인접하여 중정이 개방된 공간감을 주고 있다. 서산향교는 명륜당 구역과 대성전 구역이라는 2개의 구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형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공자(孔子)를 비롯한 5성(五聖)과 송조 2현(宋朝二賢), 그리고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현황]

서산향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의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례적 기능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는 충남향교재단이고, 관리자는 서산향교로 되어 있다. 2011년 현재 서산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전적 판본 15종 80여 책이 소장되어 있으며, 「서산군 신학기(瑞山郡新學期)」[1669]·「문묘 중수기(文廟重修記)」[1648] 등과 같은 일제 강점기 이전의 현판류 18종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 계단 아래 우측으로는 1966년에 세운 서산향교 중수교토 조성공적비(瑞山鄕校重修校土造成功績碑)가 남아 있다.

서산향교에는 수령이 약 500여 년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1574년 서산향교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올 때 『호산록』의 저자 한여현의 선인이 심은 4그루의 은행나무 중 한 그루로 추정된다.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2008년 4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산향교 유림회에서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서산향교의 이건 과정이나 참여 구성원들의 활동을 통해 서산 지역 향촌 사회의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다. 또한 현판이나 전적 등의 남아 있는 향교 자료들은 향교의 이건 과정이나 절차, 연혁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