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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14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0년 1월 9일연표보기 - 인언민과 이보현, 해미에서 첫 번째 순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4월연표보기 - 조산리 여숫골 생매장 순교 터에서 유해 발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연표보기 - 해미성당 설립으로 성역화 착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6월 17일연표보기 - 조산리 여숫골 순교자 기념 성당 건립
읍성 해미읍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지도보기
처형지 여숫골 순교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 지도보기
처형지 서문 밖 순교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지도보기
성당 순교자기념성당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489-79 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조산리에 있는 천주교의 성지.

[개설]

해미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중요한 순례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숨져간 이른바 ‘무명 순교자’가 가장 많은 곳이며, 그 처형 방법도 자리개질·생매장과 같이 가장 참혹했다. 조선 후기 충청도 서북 지역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았다. 때문에 내포 지역에 있던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가 해미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관변 기록과 천주교 측 증언록들을 토대로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179명에 이른다. 하지만 무명 순교자의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대부분은 1866년(고종 3)부터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희생되었는데, 특히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내려진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군율을 어긴 자를 먼저 처형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던 일]은 영장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후에 보고하지 않았거나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은 유교적 사회 질서로부터 소외된 인간성과 불합리한 현실을 천주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목숨까지 바쳐 지키려 하였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해미순교성지를 찾고 있다.

[1860년대의 해미]

해미읍성 중앙에는 3칸짜리 기와집으로 지은 감옥 두 채가 있었다. 조석으로 끼니를 제공하기 위해 옥문을 열면 옥 안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이주필(李周弼) 역시 이 무리에 끼어 옥 안을 살펴보곤 하였는데 ‘십자패’를 가진 사람이 있었고, 그들을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라 들었으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수십 년 배워 익힌 학문을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천당이 있고 아래로는 지옥이 있으니 지금 참수를 당한다 해도 스스로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배교(背敎)하면 살려 준다는 분부는 비록 감격되오나 한 번 죽은 후에는 천당의 부귀영화가 저절로 눈앞에 있게 되니, 오직 성교(聖敎)를 보전하고 빨리 죽음으로써 공이 훼손되어 욕됨을 받는 일을 면하기 바랄 뿐입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천주를 저버리고 목숨을 얻는 대신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죽음으로 증언하고자 하였다. 해미가 거대한 순교지가 된 것은 충청도 서북 지역의 군사와 치안을 해미 진영이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천주교인들은 ‘세상의 변혁을 바라고 생각하는 사람[思慾變世者]’ 혹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통외분자(通外分者)’로서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무리로 낙인 찍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영장의 또 다른 임무였다.

해미읍성의 서문 밖에 살던 이주필은 당시 서문 주변과 성 밑에서 벌어진 처참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문 밖은 참수, 교수, 자리개질 등의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장소였다. 당시 악명 높았던 토포병방(討捕兵房) 박영완은 죽지 않은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심지어 죽은 사람의 눈에 불을 붙여 대어 보기까지 하였고, 혹시 죽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마구 때려서 죽게 하였다고 한다. 또 하루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길게 엮어 바다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을 박승익(朴承益)과 이주필이 따라가 보았다. 당시 들을 지나 내를 건너면 오리나무와 버들 숲이 있었는데, 거기에 구덩이를 파 사람들을 옆에 세우고는 누군가가 “지금이라도 성교(聖敎)를 않는다고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욕하여라. 지금이라도 놓아 주마.”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예수와 마리아를 부르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형역들은 배교를 거부한 신자들을 교수형에 처하거나 산 채로 파묻기도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의 생매장 터이다.

[해미의 순교자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800년 1월 9일에 장살형(杖殺刑)으로 순교한 인언민(印彦敏)[마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프란체스코]이다.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에 면천(沔川)에서 체포된 박취득(朴取得)[라우렌시오]이 해미 관아로 이송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처벌은 1800년을 전후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의 첫 번째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비오, 1814년 옥사]를 비롯하여, 덕산·당진·면천 등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계속 순교하였다.

특히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동안에는 서산·해미 지역은 물론 홍주·예산·신창 등 내포 전역을 넘나들며 잡혀온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기록상으로 이 시기의 순교자만 무려 122명에 이른다. 이들의 체포와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 1784년(정조 8)임을 감안할 때, 이 지역의 천주교가 매우 이른 시기에 수용·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상당수가 무명 순교자인 해미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비특권적 계층으로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적 평등의 가치에 일찍이 눈을 뜬 사람들이었다.

[해미순교성지를 세상에 알린 범바로 신부]

1935년 한 프랑스인이 해미와 서산 일대를 두루 다니며 이름도 모르는 노인들을 찾고 있었다. 긴 시간의 수소문 끝에 남자는 해미 서문 밖에 살던 이주필과 음암에 사는 박승익을 만나게 되었다. 84세, 85세였던 이들은 1868년(고종 5)을 전후하여 해미에서 행해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목격 당시 그들의 나이는 17세, 18세로 처참했던 그날의 광경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뒤안길에 감추어져 있던 해미 순교자들의 처절한 외침이 비로소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주필과 박승익을 찾아온 프랑스인은 상홍리에 있던 서산성당[현 서산 동문동 성당의 전신]의 범바로[P. Barraux, 베드로, 1903~1946] 신부였다. 범바로 신부는 1903년 2월 23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27세가 되던 1930년 6월 파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해 10월 31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한국에 파견된 범바로 신부는 1932년 8월 5일 서산성당에 부임하였다. 순교자들의 자취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해미를 찾게 한 첫 번째 공로자는 범바로 신부였다. 범바로 신부는 1935년 해미의 순교지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그 증언들을 토대로 조산리의 생매장 터를 발굴하여 당시 서산성당으로 이장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1935년 당시에 천주교 기관지라 할 수 있었던 『경향잡지』에는 일곱 차례에 걸쳐 해미의 순교 사실들에 대한 증언과 구전들이 소개되었다. 이는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처절한 순교 현장으로서의 해미성지를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범바로 신부와 서산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 발굴에 나섰다. 발굴처에서 시신 수십 여 구의 썩은 진토(塵土)를 확인하였고, 이 가운데 10여 구의 유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통해 해미순교성지는 자유로운 신앙을 위한 한(恨) 맺힌 절규와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편 범바로 신부는 1937년에 서산성당을 상홍리에서 동문동으로 옮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새로 구상한 성당의 건축 기금은 대부분 본국인 프랑스와 그 본가에서 조달하였다고 한다. 범바로 신부는 1946년 1월 초 열병에 걸린 신자를 문병하다가 환자가 미처 삼키지 못한 성체[밀떡]를 대신 영했다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1월 13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건립한 서산 동문동 성당 뒷산에 안장되었다.

범바로 신부의 13년 5개월 여에 걸친 활동은 현재까지 서산 지역의 천주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범바로 신부가 건립하고 이전한 서산성당은 서산 동문동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서산지구장 성당으로서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또한 범바로 신부가 발굴하고 세상에 알린 해미순교성지에는 해마다 전국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어, 그가 바라던 대로 순교자의 정신을 가르치는 장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

해미순교성지의 주요 순례 코스로는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해미읍성 형장 길의 돌다리, 서산 해미성지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해미진영 서문 밖 순교자들에게 자리개질을 했던 거머리바위와 순교 현양비를 비롯한 순교지, 순교자들의 해미 압송로였던 가야산 끝자락의 한티고개, 조산리 여숫골 생매장 터 순교지 등이 있다. 또한 천주교 박해 및 순교 현장이었던 관아, 옥터 등이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매년 9월은 ‘순교자 성월(聖月)’이라는 이름으로 순교 신앙을 기념하는 특별한 달이다. 이 시기에 순례자들이 해미읍성 안에 있는 감옥에서 나와 호야나무[회화나무]를 끼고 돌아 서문으로 향한다. 이곳을 빠져나오면 조산리 여숫골의 성당으로 인도되는 순례길이 놓여 있다. 작은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저마다 손에 쥐고 나지막한 소리로 성모송을 외며 순례자들은 140여 년 전 순교자들이 걸었던 생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걷는다. 순례자들은 참된 인간성을 얻기 위해 기꺼이 고통을 겪고, 받아들인 진리를 증언하고자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오늘도 순례의 길을 걷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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