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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고령신씨 문중의 교육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69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형수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일대에 세거하던 고령 신씨 문중이 근대 시기에 전개한 각종 교육 활동에 대한 이야기.

[고령 신씨의 청주 세거와 정치적 변천]

청주시 동쪽의 낭성면가덕면 일대에는 약 500년에 걸쳐서 고령 신씨(高靈申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 왔다. 고령 신씨 문중은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세거하였으므로 ‘산동 신씨(山東 申氏)’ 또는 ‘산동문중(山東門中)’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대 공신이자 대신인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아들 가운데 신정(申瀞)[1442~1482], 신준(申浚)[1444~1509], 신형(申泂)[1449~1487]의 후손들이다. 가장 먼저 신형의 아들 신광윤(申光潤)[1468~1554]이 입향하였고, 이어서 신준의 증손 신석회(申碩淮)[1515~1575], 신정의 6대손 신절(申梲)[1596~1688] 등이 차례로 들어와 세거하였다.

산동 신씨는 처음에 신숙주의 자손으로서 훈구(勳舊) 성향을 띠었다가 사림(士林)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림으로 변화하였고, 신식(申湜)[1551~1623]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으로 들어간 이래 대부분 남인(南人) 당색을 갖게 되었다.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이인좌(李麟佐)[?~1728]를 비롯한 소론(少論)과 남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탁남(濁南)에 속한 신천영(申天永)[?~1728] 등이 가담하여 일부 인사가 몰락하기도 하였으나, 문중 대다수는 청남(淸南)이었으므로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중앙 관직에 계속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순조[재위 1800~1834] 대에 이르러 외척의 세도 정치가 본격화하면서 남인 출신의 인사는 점차 배제되었고 산동 신씨 역시 중앙 정계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문중 내 교육운동을 주도한 인물]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이 광무개혁을 단행하며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나서자, 산동 신씨 문중의 청년들이 서울에서 관직에 있던 인사들을 가교로 상경하여 신식 학교에 입학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신식 학교 입학은 과거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입신양명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당시 신교육을 접하고 문중 개화의 선구자가 되는 인물로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1880~1922],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신흥우(申興雨)[1883~1959]를 꼽을 수 있다.

신규식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신규식의 아버지 신용우(申龍雨)[1845~1918]는 서울에 거주하며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고 고향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였기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신규식은 중앙 관리로 있던 이복형 신정식(申廷植)을 매개로 17세인 1896년 상경하여 중국어 학교인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종래 관점에서 한어학교는 중인 계층인 역관(譯官)을 양성하였으므로 양반 가문 출신이 입학하였다는 점은 전통적인 신분 관념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벼슬살이에 유리한 영어나 불어가 아닌 한어를 선택하였기에 유가적 전통을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규식은 한어학교에 재학 중이던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고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주 독립 수호와 자유 민권 신장 등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무관학교에 1900년 입학하여 군제 개혁을 요구하는 동맹 휴학을 모의하였고 고향 청주에 학교를 세워 문중 개화를 추진하다가 1903년 졸업하였다.

신채호는 조부 신성우(申星雨)[1829~?]의 처가인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신성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가족들이 고향을 등지고 처가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였으며,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낙향한 뒤에는 소유한 토지가 적어서 소작을 얻었고 사숙(私塾)[서당]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신채호는 아버지 신광식(申光植)[1849~1886]이 마흔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나자 귀래리로 옮겨 와 조부의 사숙에서 10여 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7년에는 조부의 소개를 받아 천안 목천에 낙향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을 드나들며 소장된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다음해인 1898년 신기선의 천거를 받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898년 신채호신규식과 마찬가지로 만민공동회에 참여함으로써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흥우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면휴(申冕休)[1845~1933]가 출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었으므로 일찌감치 상경하였다. 신흥우는 1894년 감리교 계통의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1899년 졸업하기까지 신학문을 학습하였는데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의 지도를 받고 이승만(李承晩), 주시경(周時經) 등과 교류하였으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1년 독일어 학교인 관립 덕어학교(德語學校)에 입학하였고 학생회 토론회에서 대통령제를 주장하여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1903년 초에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신규식, 신채호, 신흥우 등 세 사람은 과거제 폐지로 한학을 통한 관직 진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다양한 형태로 신학문을 접하였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개화로 사상이 전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문중학교와 학계(學契)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문중을 개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신규식 등의 뒤를 이어 산동문중의 청년들이 신식 학교에서 수학하거나 정부 내의 신식 기관에서 활동하였는데, 앞서 신식 교육을 받고 개화하였던 신규식 등 문중 내 선구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규식, 신채호, 신흥우 등과 달리 한학을 수학하며 문중 교육에 나선 인물로 신백우(申伯雨)[1886~1962]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백우낭성면 관정리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신채호와 함께 아버지 신병휴(申秉休)[1863~?]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신규식, 신채호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 불릴 만큼 총명하였다고 한다. 신백우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문중학교를 설립하는 데 이바지하였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청주와 서울을 소통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문중에 의한 근대 신식 학교의 설립]

개항 이후 설립된 근대 학교는 대부분이 기독교의 선교 학교였고 민립 학교로는 서울에 1896년 설립된 중교의숙(中橋義塾)과 1898년 설립된 흥화학교(興化學校)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1901년부터 향교를 교사(校舍)로 지원하고 부속된 전답 등을 재원으로 활용하는 형태의 소위 향교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보수적 성향을 지닌 유생들이 반발하였고 애써 세운 학교마저도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폐교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지방에 본격적인 근대 학교 교육이 자리 잡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시기에 산동문중은 문동학원(文東學院), 덕남사숙(德南私塾), 산동학당(山東學堂) 등 3개 학교를 문중촌에 차례로 설립하였다. 당시 양반 문중촌에 신식 교육 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문중 내의 양해 혹은 합의가 필요하였으므로 전국적인 기준으로 볼 때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중학교의 설립에는 앞서 언급한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 등 개화 선구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신태휴, 신용우 등과 같이 문중 내에서 사회적 비중이 높은 원로들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동 신씨 문중 최초의 문중학교인 문동학원은 신백우의 전기에 의하면 1901년 인차리에 설립되었으며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가 강사였다고 한다. 학교를 설립한 주체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신규식의 고향에 세워졌으므로 신규식과 관련 있는 인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런데 이때 신채호가 한문무용론(漢文無用論)을 주장하다가 문중의 반발을 샀다는 말이 있고 강의를 담당한 인물들이 서울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문동학원이 계속 유지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다음으로 덕남사숙은 1903년 신규식이 고향 마을에 직접 설립하였으며 산술과 측량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고 유능한 교사를 외지에서 초빙하는 등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실업 과목을 가르친 사실은 근대 문물의 교육을 통한 자강·자주 의식의 고취가 목적이었고, 전통적으로 문관을 선호하였던 문중 내에 개화사상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어서 산동학당은 1905년 신백우가 고향인 묵정[현 낭성면 관정리] 신충식(申忠植)의 집에 세우고 신채호와 함께 농촌의 청소년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문동학원, 덕남사숙, 산동학당의 설립에 대하여서는 신백우 전기의 기록이 유일하며 여타 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으므로 더 이상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이상과 같이 1901년~1905년 동안 문중 내 개화 선구자의 학교 설립은 근대 교육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으나, 문중의 개화에 대한 태도 변화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문중 내 개화 선구자들의 뒤를 이어 신승구(申昇求)[1850~1932]가 1908년 문동학교(文東學校)를, 신형우(申亨雨)가 1909년 청동학교(淸東學校)를 각각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1905년 이전에 지방의 작은 문중 마을에서 문동학원, 덕남사숙, 산동학당 등 3개 학교가 3년 이내에 연속하여 설립되었다는 것이 전국적 추세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성도 없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 근거가 없어서 문중학교의 실존 여부 및 설립 연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연구 발표가 있다. 요컨대 산동 신씨는 1900년대 초반 선구적인 문중 인사들에 의하여 문중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추구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근거 자료를 세밀히 검토하면 다소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하여 수정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학계의 조직]

산동 신씨의 교육운동에서 문중학교 설립과 함께 주목하여야 할 사실로 학계(學契)의 조직이 있다. 1908년 5월 재경 산동 신씨 인사들은 ‘의무 교육을 연구하고 친족 간의 의리를 돈후하게 할 목적’, 다시 말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발달시키고자 ‘영천학계(靈川學契)’를 조직하였다. 영천학계는 총감(總監) 신태휴, 계장(契長) 신면휴, 부계장 신용우, 총무 신규식, 부장(部長) 신정식 등 신규식 일가가 주도하였으며 부원(部員)으로 신채호신백우 등 12명이 참여하였다.

영천학계 관련 인사들은 신학과 구학의 장점을 취하는 ‘구체신용(舊體新用)’의 방법으로 학교를 세워 문중 자제의 의무 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산동 신씨 문중의 영천학계 조직은 『황성신문(皇城新聞)』[1908년 5월 13일·15일자]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8년 6월 5일·11일자] 등에 소개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재경 종인(宗人)이 학계를 조직하여 지방 문중촌의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전국에서도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영천학계의 취지문과 권고문이 발표되자 산동 신씨 문중은 즉각 호응하여 학교 설립에 나섰다. 1908년 5월 신승구는 서울 종회소(宗會所)에 답신을 보내고 신광우(申光雨), 신완식(申完植), 신철휴(申徹休), 신만우(申萬雨)와 함께 학교 설립을 알리는 통문을 문중에 돌렸다. 이리하여 1908년 7월경 문동학교가 설립되었고 신승구를 교장으로 하여 1909년 6월 12일 인가되었다. 당시 문동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이었고 교사는 2명, 학생은 48명이었으며 과목은 논어(論語), 수신(修身), 본지(本地), 본사(本史), 위생(衛生), 물리(物理), 국어(國語), 일어(日語), 산술(算術), 작문(作文), 습자(習字), 도서(圖書), 체조(體操) 등 13개였다. 그러나 문동학교는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이나 시점은 알 수 없다.

한편 최근 연구에 의하면 덕남사숙의 설립 시기는 1903년이 아니라 신채호신규식이 망명한 뒤인 1914년 이미 폐지된 문동학교의 교명을 변경하여 개교하였다고 한다. 신정식이 전 병암출장소장(前屛岩出張所長) 카와시마 오토이치[川島音市]와 함께 설립하여 숙장(塾長)을 맡았고 숙감(塾監) 신완식, 총무 오병윤(吳炳允), 학감(學監) 박윤하(朴潤夏), 교사 김상교(金商敎)·함준희(咸俊喜)·신좌식(申佐植) 등이 임원이었다. 1917년 덕남사숙은 군수 신창휴(申昌休)와 도청 학무계의 권장으로 학생 수가 날로 증가하여 봄 학기에 교실이 부족하여지자 가덕면으로 옮기고 개축하여 교실을 확장하였다. 이외 덕남사숙과 관련하여서는 자료가 없어 운영 실태 등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다.

끝으로 1920년대 전반 산동 신씨 인사들의 교육 활동은 미원면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3년에는 미원공립보통학교[현 미원초등학교]의 학부형회가 조직되었고 학제 승격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당국의 승인을 이끌어 냈다. 당시 학부형회는 회장 신건우(申健雨), 총무 신태우(申泰雨), 서기 신원식(申元植), 평의원 신태록(申泰綠) 등 산동 신씨들이 주도하였다.

산동 신씨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신규식신채호가 1900년대 초 고향으로 내려와 신백우 등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화 자강의 일환으로써 근대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을 전후로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가 만주로 망명하면서 중앙 인사들과 일정한 소통을 맺고 활발히 전개되던 청주 산동 신씨 문중의 교육운동은 국지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고령신씨 문중 교육운동의 역사적 의미]

서울에서 근대 교육을 수학한 고령 신씨 문중 인사들의 주도 하에 설립된 문중학교는 문중 자제와 지역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으며 시세 변화를 지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동시에 근대 학문을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청주 지역이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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