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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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서지민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발굴·출토된 고려 시대 불교 미술과 신앙.
[고려 시대 청주 시내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다]
신라 하대가 되면서 왕경과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융성하였던 불교문화가 점차 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당시 서원경이었던 청주 지역도 왕경의 불교문화가 유입되면서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과 금동보살입상, 청주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상[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청주 탑동 오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등의 불교 미술품이 조성되었다. 이런 양상이 고려 전기로 이어지면서 청주 지역 불교문화의 특징이 보다 두드러지게 형성한다.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의 불교문화를 살펴보는 데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 청주를 관할하던 치소를 중심으로 일대에 사찰들이 밀집하여 있다는 점이다. 먼저 용두사는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을 관할하던 치소 부근에 자리하여 각종 불교 의례를 주관하고 지역민을 종교적으로 통치, 결속하는 역할을 하는 자복사였다. 또 고려 시대 청주 호족인 청주 김씨 가문의 김예종, 김희일이 당간지주를 세우는 등 불사의 단월로 참여하고 있어서 고려 시대 청주 지역 불교 미술과 신앙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곳이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의 서쪽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하여 ‘청동광명대’, ‘청동표형병’, ‘청동향완’ 등의 고려 시대 금속제 불구류가 출토된 문화동 절터와 역시 고려 시대의 ‘청동종’, ‘청동금고’ 등이 출토된 탑동 절터가 있다. 그리고 치소 동편 무심천 건너편에는 고려 시대 금속제 불구류가 대량 출토된 사뇌사지가 있다. ‘사뇌사명 반자’를 비롯한 378점에 이르는 불구류가 무심천변 제방도로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는데, 출토지 인근에 용화사가 있다. 따라서 용화사 일대가 원래 사뇌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뇌사에 대한 기록으로 주목되는 것은 『조계진각국사어록』 중에 “진각국사가 서원부 사뇌사에서 하안거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진각국사 해심(慧諶)[1178~1234]은 조계종의 2조이므로, 당시 사뇌사는 조계종의 고승이 주석하던 선종 사찰로 상당한 규모와 사세를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뇌사에서 인접한 곳에는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68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가 발견되었다. 그 밖에 ‘기사명 금고’와 ‘청동향완’, ‘청동향로’ 등의 금속제 불구도 발견되어, 일대에도 통일 신라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법등이 켜진 사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운천동 사지의 서편으로는 고려 시대 불상의 광배, 철불의 나발을 비롯하여 각종 금속제 불구류가 대량 출토된 흥덕사지가 있다. 이처럼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은 도심에 대찰들이 연접하여 있음을 볼 때, 사찰이 단순한 지역민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종교 시설의 역할 외에도 사회와 문화를 이끌었던 주체로 자리 잡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밖에도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의 불교 미술과 신앙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찰은 보살사와 흥덕사를 꼽을 수 있다. 보살사는 고려 전기에 태조의 아들이자 법주사 중창을 주도하였던 증통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왕자 신분의 고승이 주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살사는 당시에 대단한 사세를 갖추고 있는 대찰로 청주 지역의 불교문화를 주도하는 비중 있는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손꼽히는 『불조직지심체요절』[1377]을 간행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흥덕사는 고려 후기 유행한 간화선의 고승이었던 백운화상 경한이 주석하였던 도량이다. 게다가 당대에 유행하였던 선종 조사들의 어록과 게송을 묶어서 금속 활자로 인쇄할 정도의 문화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흥덕사는 단순한 지방의 사찰이 아니라 당시 불교계에서 비중 있는 주요 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시대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 주는 용두사지 철당간]
고려 시대 조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 석탑 등의 불교 문화재도 당시 불교 미술과 신앙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의 불교 미술과 신앙에 대하여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하여야 하는 주요 불교 미술품은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조성기’에 따르면, 당시 향리 중에 최고의 직인 당대등(堂大等)이자 지역 유지인 김예종이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염질]에 걸리자 치료를 목적으로 철당간을 세울 것을 발원하였고, 종형이자 당대등이었던 김희일이 뜻을 이어 30단의 철통으로 이루어진 높이 60척[18m]의 철당간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세운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943]의 음기에 기록된 단월 중에 ‘유덕산인(諭德山人) 청주(靑州) 석희시랑(釋希侍郞)’이라고 기록되어 청주 출신임을 알 수 있는 석희시랑과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에 단월로 등장하는 김석랑 대등은 관직명은 다르지만 944년과 962년이라는 거의 같은 시기에 청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므로 같은 인물이라고 판단된다. 더 나아가 김석랑이라는 인물은 태자(太子)의 시종(侍從)을 뜻하는 ‘유덕산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비록 하급 관리인 ‘시랑’에 불과하지만 중앙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호족인 청주 김씨 가문의 일원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김석랑은 국가 운영의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조영되었던 자복사 불사에도 ‘대등’이라는 중앙 정부에서 수여한 직함을 갖고 단월로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석랑의 활동을 통하여 보면 고려 전기 청주는 중앙 정부와 동떨어지지 않고 직접 연결되어 불교 미술과 신앙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런 연관 속에서 당시 철기 문화의 주요 거점이었던 충주와도 불교 미술의 인적·기술적 교류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일반적인 당간이 주로 목재나 석재로 제작되는 데 비하여 철제로 제작되어 특수하며, 철제당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작 기술을 선보인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이물질이나 기포의 흔적 없이 표면이 깨끗하고 매끄러워서 뛰어난 주조 기술을 보여 준다. 특히 밑에서 3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명문의 글자는 획의 삐침과 뻗침까지 정확하게 표현되어 글자가 정교하다. 이런 특징을 통일 신라와 고려 전기의 철불에 새겨진 명문과 비교하여 볼 때,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발원과 후원을 주도하였던 청주 김씨 가문에서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철장을 동원하여 제작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발원자의 한 사람인 김석희는 이미 중앙 정부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충주의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 불사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던 다인철소 등 충주 지역의 철장들이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을 제작하는 데 참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귀엽고 독특한 도상의 보살사 불상]
청주 보살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과 석조지장보살좌상도 고려 시대 청주 지역 불교 미술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은 하나의 석재를 광배로 삼아서 2구의 불상을 나란히 조각하였다. 오른쪽 불상과 왼쪽 불상은 거의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다만 수인을 결한 양손이 각기 달라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낮고 넓적한 육계의 표현, 갸름하면서도 살집이 적당히 올라 통통한 얼굴, 어린아이 같은 앳된 인상 등은 통일 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한 표현이다. 한편 대개 2구의 불상이 나란히 있는 도상은 『법화경』「견보탑품」에서 석가모니의 설법이 진리임을 석가모니가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다보불이 증명하였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석가불과 다보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도 그러한 예로 보기도 하나, 『법화경』「견보탑품」의 내용과 일치하는 도상 요소를 찾을 수는 없어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도상 해석이 필요하다. 같은 불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지장보살좌상도 석조이불병립상과 같은 재료인 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탄력감이 줄어든 불신의 표현, 간략한 음각의 선으로 대의의 옷 주름을 표현하는 방식 등 양식의 특징이 같아서 두 불상은 고려 전기에 동시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귀여운 동자승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민머리를 하고 있어서 대체로 성문형의 지장보살로 보고 있다. 하지만 도상적인 원류가 될 수 있는 당나라나 통일 신라의 성문형 지장보살상과는 차이가 있는데, 특히 손에 보주를 쥐고 있지 않아서 과연 지장보살상인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과 석조지장보살상은 고려 전기 조성된 것으로 통일 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청주 지역의 불교문화가 통일 신라 이래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불상 양식의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조성된 다른 불상들과는 유사하게 비교되는 예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도상을 하고 있어서 청주 지역 나름의 지역적 신앙을 반영한 불교문화가 성립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주의 지역색을 가진 동화사 불상]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문동리에 있는 동화사의 대적광전에 주존으로 봉안된 청주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도 고려 전기 청주 지역 불교 미술의 지역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청주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광배가 없어지고 잘못 보수되어 원래 얼굴을 잃어버렸지만, 불신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가슴과 팔, 허벅지 등에 부분적으로 양감이 드러나는 등 비교적 건장한 체구이지만 안정감 없이 둔중하다. 또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대좌 중대석 밑의 굄돌, 대좌 중대석의 보살상이나 하대석의 사자상은 고부조이지만 정교하게 표현되지 않아서 조각 수법이 떨어지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통일 신라 후기에 유행하는 불상 양식을 재현하지 못한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가슴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 방식으로 걸쳐진 대의와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두 손의 위치가 바뀐 수인의 형태가 주목된다. 지권인을 반대로 결한 좌권인이나 양쪽 어깨에 걸친 대의를 바짝 추켜 올려서 걸친 대의 착의법은 같은 시기에 전국에 걸쳐 널리 조성되었던 다른 비로자나불좌상에서는 찾을 수 없고, 현재 청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있는 청주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일치한다. 청주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양식 특징에 비추어 보아 고려 전기에는 통일 신라 왕경의 불상 양식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지역 나름의 불상 양식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청주만의 불교 문화를 형성하다]
고려 전기 청주 지역은 지역 나름의 불교문화가 형성,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여건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선진의 불교문화를 동경하여 왕경의 불상을 모방하지 않고 청주 지역에서 존숭되고 있는 불상을 모본으로 같은 유형의 불상들을 조성하면서 나름의 불교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고려 전기 청주 지역 불교 미술의 지역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청주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청주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지역의 통일 신라 불상을 모본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수인과 착의법 면에서 차별화되었다. 이처럼 기존 역사학계에서 문헌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도출하였던 연구 성과뿐만 아니라 사찰 터에 대한 발굴 조사 자료를 비롯하여 지역에 전하고 있는 불상, 석탑, 불구 등의 불교 미술품의 특징을 종합하여 볼 때,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은 통일 신라 서원경의 불교 미술과 신앙이 이어지는 한편 고려 전기 새롭게 전하여진 왕경의 불교문화를 공유하면서 나름의 지역적 특색이 가미된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형성, 향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