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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군과 청주시가 통합하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64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일

[정의]

충청북도에서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된 행정 개편에 대한 이야기.

[개설]

1946년 6월 1일 청주시와 청원군으로 나뉘어졌다가 주민 투표를 통하여 2014년 7월 1일 청주시로 통합하였다.

[청주에 살아도 청원에 살아도 고향을 물으면 청주!]

우리나라 사람은 통성명을 하고 나면 다음으로 묻는 것이 사는 곳이 어디며 고향은 어디냐 하는 것이다. 고향이 같거나 외가가 있거나 군대 생활을 하였거나 등 어떤 연고가 있는 지역이면 반가워서 금방 방언이 튀어 나오고 친숙한 말투로 변하여 어느덧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허물을 한 겹 벗게 된다. 이것이 우리네 사는 방식이고 인지상정이었다. 고향을 말할 때는 대개 충청도 또는 충청북도라고 조금 넓은 지역을 말하고 나서 충청도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은 청주, 충주, 괴산, 보은 같은 구체적인 지역을 말한다. 그런데 청원군 사람들은 이때 청원에 산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냥 청주라고 말하고 나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제야 청원군 무슨 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청원군 사람이 자신을 청주 사람으로 소개한 것은 절대로 고향을 속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청원군이라고 말하면 외지 사람이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차피 청주나 청원이나 그게 그거고 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내면에 잠재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청원 사람들은 관공서에 볼 일이 생기면 청주로 나왔고, 곳곳에 장터가 있지만 귀한 물건은 청주에서 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마치면 중학교부터는 당연히 청주로 나와 자취를 하거나 친척 집에 얹혀 살았다. 그렇지 않으면 콩나물 시루 같았던 버스에 몸을 싣고 고단한 통학을 하면서 청주를 학연과 지연의 원천으로 삼았다. 사실 청주와 청원은 본래 하나의 지역 공동체로서 수천 년을 함께 어우러져 살아왔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1946년에 청주와 청원으로 분리되었지만, 행정 업무 외에는 변함없이 하나의 생활권이고 같은 역사를 갖고 있는 동향이었다.

청주시는 북쪽과 서쪽은 미호강 연안의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성 산지가 펼쳐지고 동쪽은 한남금북정맥에서 분기한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금강 본류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선사 시대 이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권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삼국 시대 이후에는 미호강 유역의 청주와 금강을 낀 문의 지역으로 별도의 행정 구역이 이루어져 있긴 하였지만, 혼인과 동문수학의 인연으로 지역의 사림이 형성되었다. 사대부 집안은 청주 읍성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마을에 터전을 이루어 살면서 청주향교신항서원에 모여 학문을 논하고 예절과 풍속을 지켰다. 청주를 대표하는 ‘청주 8대성’을 보더라도 청주 한씨 외에는 모두 청원군 지역 사방에 세거하였고, ‘낭성 8현’으로 일컬어지는 고명한 선비 여덟 분도 시골 각처에 살았지만 청주의 인물로 추앙되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6분도 모두 시내와는 멀리 떨어진 농촌을 고향으로 두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선 시대 청주 사림의 주요 인물들과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청원군 지역 출신이지만 청주의 인물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1946년 6월 1일 청주읍은 부(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청원군으로 분리되어 60여 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청주와 청원은 불가분의 관계에서 청주 사람이나 청원 사람이나 뿌리는 하나라는 의식으로 더불어 살아왔다. 그래서 누구라도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청주 사람이든 청원 사람이든 똑같은 대답으로 “내 고향은 청주입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함께 하나가 되어 삽시다]

1950년대 이후 청주시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면서 교육의 도시로 알려졌다. 청주의 인구가 10만 명일 당시 학생의 수가 인구 절반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등하교 시간이면 청주역 일대가 온통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차는 장관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십중팔구 청원군 지역에 살면서 충북선 열차를 타고 청주 시내의 학교로 통학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청원군 농촌에서 소를 팔려면 먼 길을 소와 함께 걸어서 청주 남주동 우시장으로 왔고, 잔칫날 옷 한 벌 사 입으려면 성안길 쇼핑은 필수였다. 청원군 사람들은 교육이나 상공업의 문제를 청주에서 해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이 청원 사람들로 청주 도심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돈 버는 사람은 청주 사람이고 쓰는 사람은 청원 사람이었다. 청주시와 청원군은 이른바 도넛 모양의 구조로 마치 달걀의 흰자가 노른자를 감싸고 있듯이 청원군이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어서 행정 구역만 다를 뿐 주민의 교육, 문화, 경제 생활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일 생활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지리적으로 동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청원군청은 청주시의 도심지인 성안길에 자리하고 있었고, 청사 본관 뒤에는 고려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청주목사가 주재하며 지역을 다스리던 동헌 건물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데, 청주시 관리 대상이면서 사용은 청원군이 하는 미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듯이 청주시와 청원군은 삼국 시대부터 역사적, 지리적으로 밀접한 지역적 동질성과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 이제 함께 하나로 살면 어떨까 하는 여론이 이심전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한편, 1990년대 말에 청원군은 본래 청주군이었는데 청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이 청원군이 된 것인데, 화살을 잘못 맞아 역사 깊은 명칭을 빼앗긴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당시 청원군에서는 청주시와 통합될까 늘 노심초사하던 중이어서 통합 논리에 빌미를 줄까 두려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통합의 진통, 1차 추진의 실패]

1994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 행정 구역 통합 정책에 따라 충청북도는 청주시와 청원군, 충주시와 중원군, 제천시와 제원군의 행정 구역 통합을 추진하였고, 1995년 충주시와 제천시는 주민투표를 통하여 도농 복합 도시로 통합되었지만,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은 청원군 주민들의 반대로 결렬되었다. 청원군 주민들이 통합에 반대한 논리는 청원군의 인구나 재정으로 충분히 독립적인 행정 구역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도 하였지만, 청주시와의 통합은 결국 청원군이 흡수되는 것으로 세금 등의 부담만 떠안게 될 것이라는 일부 정치인과 기득권층의 반대 논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제시한 시·군 통합 대상 지역의 선정 기준은 역사적 동일성, 동일 생활권, 시가 군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지형적 조건, 시·군 명칭의 동일 여부 등이었다. 당시 청주·청원 통합의 필요성으로는 지역의 균형 발전을 도모할 수 있고, 광역 행정 사업을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으며, 공공 기관 및 공공시설의 공유로 행정과 재정의 낭비 요소를 제거하여 지방 정부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주민 화합과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통하여 지방화와 세계화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당시 통합의 기본 원칙은 네 가지로 제시되었다.

첫째, 통합 여부는 지역 주민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 결정한다. 주민 의사 수렴 방법은 1994년 4월 25일 정례 반상회에서 주민 의견 일제 조사를 실시한다. 다만 시·군 통합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간에 주민 투표 절차법이 제정되면 시기 등을 고려하여 적용 여부를 결정한다.

둘째, 통합 지역의 지위는 시로 하며 도농 통합형으로 추진한다. 이에 시에 읍·면을 두고 종래 농촌 지역으로서 누리던 특례를 모두 인정한다.

셋째, 통합이 완료되더라도 행정 담당 조직[국]의 설치와 인력 보장, 인구가 과대한 동의 분리 조치 등으로 공무원의 신분을 절대 보장한다.

넷째, 통합시의 재정 확충을 위하여 특별 대책을 강구한다.

다섯째, 1995년 지방 선거를 감안하여 통합 작업을 연내에 완결한다.

이러한 통합의 기본 원칙에 따라 1994년 4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반상회를 통하여 실시한 주민 의견 조사 결과 청주 시민 76.5%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청원 군민 65.7%의 반대로 통합이 무산되었다.

[2차, 3차 추진의 실패 속에서 가능성을 보다]

1994년 1차 통합 추진은 당시 관선 청원군수의 민선 자치단체장 출마로 인하여 청원군 측에서 조직적으로 통합을 반대하는 요인이 있게 되었다. 1차 통합의 실패 이후에는 주로 청주 지역 통합 찬성 세력을 중심으로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들은 크게 시민 단체, 각종 학회와 연구소, 지방 정부 및 의회, 언론 기관으로 이루어졌다. 청주시민회가 중심이 된 통합 추진 사업이 계속되어 1997년부터 공무원과 기득권 중심에서 탈피한 시민 중심의 통합 운동이 추진되었다. 충청권에 기반을 둔 지방자치학회 및 대학 부설 연구소들은 양 시·군 통합의 당위성을 골자로 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지방 선거에서 통합은 최대 이슈로 제기되었으며, 청주시의회는 관내 통합 여론을 주도하였다.

2002년 주민 투표로 탄생한 민선 3기 지방 정부에서 청주·청원 통합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통합 문제는 언론과 학계 및 시민 단체들을 중심으로 주로 청원군보다는 청주시 측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2005년 청주시와 청주시의회가 통합에 대한 ‘청주·청원 통합에 따른 이행 결의문’을 공표하자, 청원군수는 5개 선행 조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통합에 찬성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하여 청원군의회는 같은 해 5월 ‘청원·청주 통합 여부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청원군수와 청원군의회가 상반된 의견을 표명하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실시한 2005년 9월 29일 주민 투표의 결과는 1차 통합 추진 당시보다 높은 찬성률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원 군민 53.1%의 반대로 2차 통합 추진 또한 무산되었다.

2차 통합 추진의 무산으로 인하여 양 지자체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어 청주시의 강력한 이해 표출과 청원군의 반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정부의 도농 통합 정책은 정주 생활권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청주·청원 통합의 쟁점은 양 지역의 대립적인 지역 발전 담론을 축으로 형성되었다. 1·2차 청주·청원 통합 추진 실패의 주요 요인은 청원군 지역 성장 연합의 독자적 지역 발전론에 따른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즉, 청원군은 청주시와 굳이 통합하지 않더라도 오창과학산업단지와 오송생명과학단지 조성 등을 연계하게 되면 자체적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 추진하는 도농 통합 정책의 복잡성과 불확실성도 통합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즉, 청주시는 정주 생활권론의 맥락에서 ‘통합 발전’을 주장하였지만, 청원군은 적정 도시 규모론의 맥락에서 ‘독자 발전’을 주장하는 등 서로 반대되는 이해관계가 표출되었다. 통합 추진 과정에서 양 지역의 이해관계의 쟁점은 주로 정치·행정·경제·생활문화의 측면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선 4기 막바지에 열린 3차 통합 논의는 2010년 2월 19일 청원군의회의 반대 표결로 또다시 결렬되었다. 3번의 실패는 청주시로의 흡수 통합이라는 청원 군민들의 불안과 걱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드디어 청원군민 마음을 바꾸다]

1994년의 1차 통합 추진이 실패한 것을 비롯하여 세 차례의 통합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는 결과를 보았으나 그 추진 과정에서 청원·청주 통합의 당위성은 청주 시민뿐만 아니라 청원 군민들에게도 점차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선 5기 정치권은 청원 군민들의 걱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2010년 8월 11일 통합 추진 기본 원칙에 합의하였다. 청원·청주 주민이 중심이 되어 축제 속에 통합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청원군민협의회’가 주도하여 ‘청원 청주 상생 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등 청원군이 소외되지 않는 통합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2012년 벽두부터 청주·청원 통합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2012년 1월 19일 충청북도와 시·군 단체장의 ‘청주·청원 통합에 관한 원칙과 일정 재천명’의 공동 성명서가 발표된 후 ‘청원청주통합시민협의회’가 출범하였다. 청주시는 5월 1일부터 청원군·청주시의 시내버스 요금 단일화를 결정하였다.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하나의 도시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청원청주통합시민협의회는 4월 13일 통합 방법을 결정하였다. 청원군은 주민 투표를 통하여 통합의 여부를 결정하고 청주시는 시의회 의결로 통합 결정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5월 24일 청원군의회는 통합 찬반에 대한 주민 투표를 6월 27일에 실시하기로 의결하였다.

우선 청주시의회는 6월 21일 만장일치로 통합 찬성을 의결하였다. 문제는 6일 후인 6월 27일에 실시 예정인 청원군의 주민 투표였다. 이번 주민 투표는 과거처럼 찬성·반대 비율보다도 투표 결과에 대한 효력이 생기는 투표율 33.3%를 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33.3%의 투표율을 넘으려면 유권자 12만 240명 중 4만 80명이 투표에 참여하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투표율은 저조하였으나 투표 종료 40분을 남긴 오후 7시 20분에 투표율이 극적으로 33.3%를 넘기면서 청원 군민들의 투표는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개표 결과 79.03%라는 높은 찬성률을 얻어 10년 가까이 끌어온 통합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1946년에 청주시와 청원군으로 행정 구역이 분리된 이후 66년 만에 전국 최초 주민 주도형 통합이라는 값진 결과를 이룬 것이다. 이에 청원군·청주시통합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2013년 1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설치 및 지원 특례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통합에 따른 일련의 일정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래 하나였던 지역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환원된 것이라고 할 수다.

충청북도 12개 시·군의 경제력 평가에서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은 양적으로 충북 지역 내 최대의 경제권을 형성함은 물론 경제 성장 기반, 실물 경제, 금융 경제, 재정 등의 분야에서도 도내 다른 시·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도 우세한 상황을 도출한 것이다. 이에 통합 청주시는 전국적인 경쟁력은 물론 중부권 최대 핵심 도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충청북도 발전 동력의 중심축이자 원동력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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