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시대를 보여 주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 청주 지역의 문중 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60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가덕면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한신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역사의 흐름과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데 유용한 문서.

[개설]

충청북도 청주에서는 고령 신씨(高靈 申氏) 문중에서 발견된 『연행일사(燕行日史)』, 함종 어씨의 간찰 등 고문서가 발견되어 조선 시대 사족의 문화 교류 및 당대 시대상 파악에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연행일사』는 조선 후기 문신 신좌모(申佐模)[1799~1877]가 1855년부터 1856년까지 청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었을 때 작성한 연행 기록이다. 함종 어씨의 간찰에서는 함종 어씨의 구성원들이 대대로 김집, 송시열, 송준길, 김원행, 송환기, 권돈인과 화서학파의 이중로,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등과 교류한 흔적이 나타난다.

[지방사에서 고문서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

각 지방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역사적 기록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물들은 개인의 일방적인 의사 표시를 위한 것도 있고, 목적과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도 있다. 한자 문화의 역사를 지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문헌(文獻), 도서(圖書) 등의 개념 외에 기록물을 문권(文券), 문서(文書), 문기(文記) 등으로 지칭하였다. 문헌이나 도서는 일반적으로 서적, 서책과 같은 성책(成冊)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고, 문권·문서·문기 등은 쌍방의 의사 표시나 권리 등에 관한 사항을 적어 놓은 단편적 기록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 동서양에서 발간된 고문서학에 관한 여러 저서에서는 대체로 발급자, 수취자, 발급 목적, 제도적 효력 등의 구성 요건을 갖춘 기록물을 특정하여 ‘문서’라고 정의하고, 여기에 과거라는 시기 설정을 더하여 ‘고문서’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한국 고문서 학계에서는 고문서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을 제시하였다. 문서를 주고받는 쌍방[발급자와 수취자]이 존재하여야 하고, 문서를 통하여 표시되는 목적이 있어야 하며, 현재의 시점에서 명백히 과거에 생성된 것이라야 한다. 한국 고문서의 시기적 상한은 문자 기록이 확인되는 삼국 시대까지 미칠 수 있다. 대체로 현재까지 한국 고문서 가운데 시기적으로 작성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은 모두 고려 시대에 작성된 사례이다. 한국 고문서의 시기적 하한에 대하여서는 1910년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한제국기까지는 군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고문서에서는 역사성, 일시성, 구체성, 다양성이라는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고문서가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면서 기왕에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하였던 역사적 사실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소송 실태, 재산 증여 및 상속 양상, 향촌 사회의 구조와 사회상,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족들의 교유와 생활상까지 당시 작성된 문서를 근거로 뚜렷한 논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고문서는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관찬 사료에서 발견되던 한계를 넘어, 향촌의 사회·생활상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고문서가 주목받았다. 고문서는 관청이나 개인이 국가의 사안을 공식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생산한 관찬 사료에 비하여 개인과 지방의 실상을 직시하는 데 유용한 사료로 활용된 것이다.

따라서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볼 수 있다. 첫째 고문서는 해당 문서가 작성된 당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유일성과 희소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사 연구에서 대표적인 사료로 거론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 등도 사료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사후 기록이라는 측면이 지적되어 왔다. 이에 반하여 고문서는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당대, 당시에 작성된 원형을 유지한 사료라는 점에서 1차 사료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둘째, 고문서는 기존에 알려진 사료에 실려 있지 않는 대목을 보완한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사 저변의 실체적 현상이나 문제를 두고 고문서가 지니고 있는 현장성은 기왕의 연구에서 시도하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여 주었다. 셋째, 고문서는 특정 소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서가 생성된 시기와 환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소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문서에 담겨 있는 내용의 다양성은 법제사, 국어사, 경제사, 사회사, 지방사, 생활사, 신분사 등 다양한 연구 분야로 확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더 나아가 학제간의 협력을 통한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청주의 고문서와 특징]

2022년 10월 1개월간 전수 조사를 벌여 청주에서는 고령 신씨 문중에서 2,359건의 고문서가 조사되었다. 충청북도 청주 고령 신씨 가문의 장손인 신모 씨[당시 61세]의 자택에는 대대로 전한 고문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2022년 9월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서는 고령 신씨 측과 연락하여 종중(宗中)을 포함하여 민간에서 보존하여 온 기록 유산을 조사하고 있으며 고령 신씨 문중의 자료도 조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고령 신씨 문중에서는 흔쾌히 조사에 응하여 조사 결과 고령 신씨 문중에서도 조선 후기 문신 신좌모[1799~1877]가 1855년부터 1856년 청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었을 때 작성한 『연행일사』 유일본이 처음 발견되었다. 신좌모는 1827년(순조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원릉별검(元陵別檢)·성균관전적·병조정랑·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고,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849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사간원사간 등을 지내고, 1855년(철종 6) 진위진향사(進慰進香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사에 참여한 고문헌과 콘텐츠연구소 대표 김근태는 신좌모의 『연행일사』가 “청나라 문인들과 나눈 대화와 한시 등이 빼곡하여 양국의 문화 교류사를 보여 주는 소중한 사료”라고 평가하였다.

『연행일사』는 연행록(燕行錄)의 부류에 속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연행록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노정에 비슷한 지역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여기에 중복과 투식의 내용은 물론 많은 양의 기록에 비하여 연행록마다 내용이 반복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 또한 기왕의 연행록과 문헌을 대폭 수용하는가 하면 같은 사안을 두고 엇비슷하게 기록하기도 한다. 표절이나 관습적 서술과 같은 투식들도 그중 하나이다. 이는 연행록의 단점이 아니라 풍부함의 반증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공간의 시간적 누적에서 오는 견문 지식과 정보의 누적과 풍부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연행록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식과 정보의 시각으로 연행록을 바라보고 이를 통하여 그간의 문학적 사유나 문화적 사유로 읽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하여 연행록이 견문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과 이를 취사선택한 시각과 기록 방식, 기록한 것을 가공하여 어떻게 분류·배치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연행록은 중국이라는 타자와 관련한 지식·정보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남긴 기록이지만 타자의 시각에서도 활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연행록을 통하여 중국을 바라볼 때, 중국 연구나 중국 자료가 보지 못하던 문제의 확인도 가능하다.

청주 가덕면에서는 간찰도 발견되었다. 원래 간찰은 죽간과 목찰에 작성한 글을 말한다. 후대에는 종이에 적거나 비단에 적은 것까지 포함하여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의 편지에 해당한다. 간찰은 일기와 함께 사적인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간찰은 일기와 달리 수신자가 정하여져 있으며 가족 혹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별도의 통신 시설이 없었던 전통 사회에서 간찰은 소식을 전달하는 정보 교류의 역할을 수행하는 매개였다. 간찰은 사적인 인편으로 전달하기도 하고 경저리나 영저리의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특히 간찰은 명문가와의 인연을 자랑하고 자신의 가문이 지니고 있는 위상을 보여 주는 증거로 활용되었다. 지역의 명문가와 교류하는 것은 그만큼 해당 가문의 명망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활동이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사족(士族)은 명망이 있는 인물을 만나 직접 인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간찰로 교류하였다.

청주 가덕면의 함종 어씨는 화서학파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던 사족이었다. 가덕면과 함종 어씨의 관계는 19세기 어윤석(魚允奭)과 어윤적(魚允績), 그리고 후손들이 청주에 거주하고부터였다. 어윤적의 아들 어취선(魚聚善)은 중국에 가서 활동하기 전에 청주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어윤석과 아들 어경선(魚敬善)은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어경선은 유인석과 함께 만주에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어윤적과 아들 어취선 역시 1910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가서 유인석의 집안을 비롯하여 항일 운동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활동하였다. 어윤적의 아들 어취선이 숙부 항렬의 문중 사람에게 보낸 간찰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어취선은 간찰에서 숙부 항렬의 집안 어른에게 조심스럽게 충고의 뜻을 담았다. 1898년(광무 2) 12월에 보낸 내용에서는 선사(先師)인 유중교에게 가르침을 들었는데 “생(生)을 용(用)으로 삼는 자는 반드시 극(克)으로 체(體)를 세우고, 극을 용으로 삼는 자는 반드시 생으로 몸을 세운다. 군자가 몸을 세우는 데 엄하면서 공손하고 화(和)하면서 절도가 있게 하며 사물에 응하는 데 위엄이 있으면서 믿음직하고, 믿음직하면서 위엄이 있어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이기고 음과 양이 합하여 응합니다”라고 하며 이를 정신에 새기고 증험하라고 권면하였다.

어취선은 숙부 항렬의 어른에게 충고의 뜻을 전하면서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충언이기에 선사 유중교의 말을 인용하여 예의를 갖추었다. 간찰의 내용은 깊은 학문이 아니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담았다. 그럼에도 어취선의 간찰에서 드러나는 바는 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었다. 아울러 짧지만 자연재해를 당한 세상에도 걱정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간찰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던 생활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다.

함종 어씨의 간찰들에서는 함종 어씨 내부에서의 문중 교류와 문중 외부와의 교류가 나타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함종 어씨가 주고받은 간찰 중에는 선대부터 전하여 오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 김원행, 송환기, 권돈인과 화서학파의 이중로,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등과 교류한 문건을 발견할 수 있다. 함종 어씨 문중에서는 이들의 간찰을 모아 별도의 장첩으로 보관하였다. 그중 1912년 3월 유인석이 어취선에게 보낸 간찰에서는 유인석과 어취선이 어떤 사안에 관심을 두고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유인석은 국사(國事)를 애통하여 하며 자신이 집안을 이끌고 요동에 들어간 것은 의리에 맞게 처신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하였다. 유인석은 본국에서 ‘왜(倭)’의 신민(臣民)이 불가하여 다른 나라의 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기술하였다. 이직신이 유중교의 행장을 지었다는 소식에 다행인 마음을 표시하고 행장과 관련한 내용을 이직신과 함께 수정, 보완[윤색]할 것을 당부하였다. 유인석은 어취선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실행한 것에 용기를 가상히 여기는 뜻을 전하였다. 함종 어씨가는 가문의 자부심을 보여 주는 간찰들을 100년 이상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간찰은 단순히 편지만이 아니라 문학 자료를 담고 있기도 하다. 옛날 선비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시를 많이 지었으며 간찰에 담아 전하기도 하였다. 회갑을 맞이한 친척이나 지인들에게는 축수(祝壽)의 시를 지어 보내고, 상을 당한 이에게는 만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벗끼리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함종 어씨 가문 간찰 가운데는 최익현이 어취선에게 보낸 시가 있는데 내용은 최익현의 당부에 관한 것이다. 최익현은 시에서 “율곡우암을 모범으로 삼고 화서를 받들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며 “따르고 어기는 것은 삶과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최익현은 김평묵과 유중교의 유풍이 남아 있으니 “남긴 책을 공부하는 것을 등한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 시는 1902년 최익현이 어취선에게 이별하며 지어준 7언 절구시였다. 최익현은 이이송시열, 이항로를 삶의 모범으로 삼고 김평묵, 유중교의 정신을 본받아 학문을 등한시하지 말라고 시로서 자신의 당부와 기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함종 어씨 가문의 간찰은 조선 후기 선비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족들과 안부를 묻고 서로를 걱정하는 간찰뿐 아니라 당대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시국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고 학문적인 토론을 하거나 국난의 시기에 서로를 격려하면서 항일 운동에 매진하는 모습과 정서들이 간찰들에 담겨 있다. 청주에서 발굴한 고문서들을 통하여 역사의 구체적인 단면을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