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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청주 지역의 장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59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한신

[정의]

조선 시대 청주 지방에서 육로와 수로를 통한 물류 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던 장시와 행상들의 상업 활동.

[개설]

조선 시대 청주에서는 청주 읍내장을 중심으로 문의·회인·청안·보은·전의·목천·연기 등을 연결하는 유통망 속에서 여러 가지 작물과 소금·해산물 등을 거래하였다. 청주는 내륙은 물론 나루 혹은 포구 등을 연결하는 상업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 전기 시장의 발생과 상업 활동]

상업은 생산과 소비를 연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화의 유통 과정에 관계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시장은 상업 행위의 중심 공간으로서 교환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전근대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비하여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은 자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은 자급적 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부식 재료를 생산하는 농업과 의류를 비롯한 각종 생활 자료를 생산하는 가내 수공업을 농가에서 직접 경영하여야 하였다. 전근대 사회가 이처럼 시장의 필요성이 약한 체제였다고는 하지만 완벽한 자급자족 체제는 아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도 교환과 시장은 사회를 유지, 운영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대부분 왕조의 도읍 건설 규범으로 채택된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서도 면조후시(面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도읍에서 행정 부서를 포함하는 조정은 앞쪽에 시장은 뒤쪽에 두고,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교환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길이다. 길의 중심에 생기는 것이 시장이기 때문에 지방의 시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 즉 사람과 물자의 이동경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길에는 뭍길만이 아니라 물길도 있다. 지방의 시장을 이해하려면 육운과 함께 수운, 해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조선 전기는 조정에서 중앙 집권에 기초한 관료 체제 아래 강력한 지배를 행사하며 상공업을 통제하였다. 관부에서는 한성에 육의전을 둔다거나 상인의 상업 행위를 허용함으로써 국가 재정과 물자 관리상의 편익을 얻으려 하였다. 이때 국가에서는 일종의 대상급부(代償給付)로서 일부 상인에게 독점권을 허가하여 전매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대상급부란 구체적인 물질로서 보상을 하는 대신 다른 형태로 혜택 또는 권리를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인뿐만 아니라 수공업자에게도 신분의 억제와 통제가 가하여져 생산품을 위한 원료의 공급과 품삯의 지급도 모두 관부의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개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되다가, 전란 이후 국가 재정 구조의 재편성이 요청되어 대동법과 같은 세제 개혁으로 공인(貢人)들에게 차츰 자본이 축적될 수 있었다. 공인의 활동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개성과 의주를 비롯한 지역에서 새로운 지방 부상(富商)이 출현하고, 부상들의 상업 활동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육의전 상인 이외에 중도아(中都兒)·도고(都庫)·도고(都賈) 등 신흥 상인이 여러 시장을 배경으로 이윤을 얻으려는 상행위를 전개하였다. 중도아는 조선 후기에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 소비자에게 직접 팔거나 행상에게 팔던 일종의 중간 상인이다. 도고(都庫)는 공물 조달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기관을 일컫거나, 기관에 딸린 건물 따위를 뜻하였는데, 이후 물건이나 일 따위를 독점하여 처리하는 행위 또는 그런 사람을 지칭하여 도고(都賈)라는 말로도 대체되기도 하였다.

시장은 개시 간격에 따라 상설시와 정기시, 부정기시로 구분할 수 있다. 원래 시장은 고려 시대에 주현(主縣)의 관아 부근에서 장시가 열렸다가 조선 건국 이후 잠시 소멸되었다. 1470년경 전라도 무안 지역에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장시가 다시 출현하였다. 매달 두 차례씩 열렸던 장문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장시는 16세기 전반에는 충청도로, 16세기 중엽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삼남의 농촌에 장시가 일반화되었다. 15~16세기 농촌 장시가 대두한 근본적인 원인은 14세기 이래 농업 기술상의 일대 혁신으로 농업 경제력이 크게 신장되고, 농업 경제력을 토대로 발생한 경제 잉여를 처분할 수 있는 교환 시장이 점차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개시되었던 장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경기까지 확대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중부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지역까지 확산되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에는 1,000개 이상의 장시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건 아래 전국의 시장은 장시 간의 연계가 이루어져 조밀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장시의 발전은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두드러졌다. 초기 장시의 개시 횟수는 한 달에 3차 열리는 10일장이 일반적이었지만, 개시일도 점차 한 달에 6차 열리는 5일장이 보편화하였고, 일부 장시는 한 달에 12회 열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들 장시 시장권을 연계하는 중심 역할지로서 대장(大場)도 형성되었다.

[영·정조대 장시 및 포구에서의 상업 유통]

1770년(영조 46)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는 전국의 장시 수는 1,064개인데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타난 1777년(정조 원년)의 전국 고을 수는 339개여서 한 고을의 평균 장시 수는 약 3개가 되었다. 산간 고을의 경우는 수가 더 적었고, 평지 고을은 평균 숫자인 3개보다 많았다. 가령 한 고을에 5일장이 5개가 있고 장날이 서로 다르면 그 고을 백성들은 매일 장을 볼 수 있어 사실상 지역을 달리하여 상설 시장이 성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경기도 광주의 사평장, 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 직산의 덕평장, 전라도 전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경상도 창원 마산포장, 강원도 평창의 대화장, 황해도 토산의 비천장,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 평안도 박천 진두장, 함경도 덕원 원산장 등을 대장으로 제시하였다.

18세기 이후 5일장 상호 간의 경제 연계는 이전에 비하여 확대, 강화되었다. 도별로 군현을 단위로 한 시장권을 넘어서는, 고을들 사이에서 권역이 형성되는 시장권이 생겨났고, 몇몇 지역의 시장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 범위로 유통망을 확대하였다. 모시 산지인 충청도 한산, 서천, 비인, 남포, 부여 등 장시는 보부상들이 각기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여 교역하였던 장시 유통망이었다. 보부상 등 행상은 조선 전기에는 국가의 억말(抑末) 정책에 따라 관청에서 발급하는 6개월 유효 기간의 영업 허가증인 노인(路引)을 발급받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업에 종사하였다. 행상들에게 부과된 행상세는 1명당 6개월에 저화(楮貨) 3장씩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정부의 행상 통제 정책은 사라졌다. 농촌 장시가 활성화하면서 일부 농민층들도 장시를 대상으로 상업 행위를 시작하였다. 농촌 장시를 대상으로 영업하였던 행상층은 보잘것없는 상품을 등에 지고 운반하였다. 행상들의 자본 축적은 영세하였지만, 장시 교환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였다. 확대된 행상의 활약으로 화폐 경제가 통용되지 않는 지방의 농가까지 상품의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포구를 통한 물자의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은 산지가 70%를 차지하는 지형 조건 때문에 도로 조건이 열악하였다. 수레보다는 소나 말 또는 지게를 이용하는 것이 좀 더 유리하였다. 조선에서는 육상 조건과 달리 수로 또는 해로를 활용한 물자의 운반이 발전하였다. 조선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강이 발달하여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포구가 다수 만들어져 있었다. 이러한 해상 교통의 유리함을 반영하여 포구가 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촌 시장인 장시가 농민이 생산한 잉여 생산물을 처분하는 소규모 시장이라고 한다면, 포구 시장은 농촌 장시를 전국적 시장망으로 연계하는 원격지 유통의 거점으로 작용하였다. 포구는 17세기 초반까지도 조세나 지대로 받은 곡물을 운송하거나 해산물 생산과 유통을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었는데,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부터 점차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18세기 이후 해상 교통은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 강의 수로로는 경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였던 포구들은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바닷물이 올라올 수 있었던 포구였다. 대포구는 서울의 경강포구 외에 낙동강 하구의 김해 칠성포, 금강 하류에 있는 은진의 강경포, 동해안의 원산포, 남해안의 창원 마산포가 대표적이었다. 이들 포구는 원산장, 마산포 주위의 창원장, 강경포 주위의 강경장을 끼고 번성하였다. 그 밖에도 섬진강 유역의 화개장, 하동의 두치장이 포구와 연계되면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평안도에서 대청 무역의 통로였던 박천의 진두장도 대정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였다. 그 외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 사진포 등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포구였다.

[조선 후기 충청도에서의 상권 형성과 청주 일대의 유통망 전개]

포구 상업의 발전으로 대포구와 대포구 주변의 소포구, 그리고 장시를 연결하는 유기적 유통권이 형성되었다. 은진의 강경포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평야와 바다를 연결하는 대포구였으며, 주위에 논산포, 임피의 서포, 나포, 함열의 웅포, 용안의 황산포와 여산의 나암포 등이 강경포구 시장권에 속하여 성장하였다. 강경포의 영향 아래 있던 소포구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강경포로 가는 선박을 자신의 포구로 유치함으로써 강경포의 상대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상선을 유치하기 위하여 소포구가 대포구와 경쟁을 벌인 것이었다.

청주는 고려 시대에는 청주목문의현을, 조선 시대에는 청주군문의현 일대를 지칭하는 지역이었다. 1827년(순조 27)경 서유구는 조선의 사회·경제를 다룬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예규지(倪圭志)」에서 청주에는 청주 읍내장·청천·송면·미원·쌍교·오근·조치원 등 7개의 장시가 개설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중 현재 청주시에 해당하는 것은 청주 읍내장, 미원, 쌍교, 오근장의 4개 장시였다. 당시 청주 읍내장은 2일과 7일에 정기시가 개시되었으며. 주로 판매된 상품은 쌀·잣·유기 등이었다. 미원장은 4일과 9일에 개시되었고, 청주 동쪽 40리[약 15.71㎞] 산내일면에, 쌍교장은 5일과 10일에 개설되어 청주 북쪽 30리[약 11.78㎞] 산외일면에, 오근장장은 3일과 8일에 개시되어 청주 북쪽 30리 북강내일면에 들어섰다. 문의현에는 문의 읍내장과 두산장(斗山場)이 개설되었다. 문의 읍내장은 1일과 6일에 읍내리에서, 회인현에 있는 두산장은 3일과 8일에 회인 북쪽 20리[약 7.85㎞] 북면에 개설되었는데, 현재의 남일면 두산리이다. 문의 읍내장은 1908년(순종 2)경 신촌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위와 같은 청주 일대의 장시들은 다시 인근 지역의 장시망과 연결되었다.

영조 후반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주위에 시장이 발달하였고, 청주를 중심으로 30리 간격으로 7개의 5일장이 들어섰다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청주읍성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청안현·보은현, 남쪽으로는 문의현·회인현, 서쪽으로는 전의현·목천현·연기현, 북쪽으로는 진천현이 통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장시들은 가깝게는 20리에서 멀게는 80리[약 31.42㎞]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지역 상인들은 거점이 되는 장시를 연결하며 청주 일대에서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7개의 5일장으로 이루어진 청주 지역의 장시망은 청안·보은·문의·회인 등의 장시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으며, 더 나아가 충청도 전역을 포괄하는 유통망과도 연결되었다. 즉, 공주 지역권·충주 지역권·한산 지역권·내포 지역권 등의 장시망과 교류하면서 물자를 교역하였다.

충청도 전역으로 장시망이 확대되면서 물류의 유통은 더욱 활발하여졌다. 당시 충청도에서 물류의 유통은 주로 수운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금강이 주요 물길이었다. 하지만 공주 동쪽은 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서 배가 드나들기 어려웠다. 이로 인하여 청주 지역은 수운을 이용하여 물류를 유통하기 힘들었다. 그러한 한계가 있었으나, 청주의 상인들은 율봉역 및 청주 인근의 16개 역을 중심으로 한 역로와 부강의 나루터 등을 이용하여 물자를 실어 날랐다. 청주 인근에 있던 부강은 금강이 굽이져 돌아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예전부터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부강의 나루터들이 서해 및 금강의 유통망을 연결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부강의 금호리에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 위하여 이용한 검시나루와 선말나루가 있었고, 부강리에는 서해의 소금·해산물 등을 교역하던 구들기나루가 있었다. 구들기나루를 통하여 들어오는 소금·해산물 등은 5일과 10일에 개시하는 부강장에서 거래되어 인근의 장시로 유통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청주 지역에서는 작물과 소금·해산물 등이 내륙의 장시는 물론이고, 수로의 나루 또는 포구장시 등에서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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