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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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양시은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에 있는 삼국 시대 성곽 유적의 현황과 역사적 의미.
[개설]
충청북도 청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영호남을 이어 주는 한가운데 있는데, 육상 교통로와 금강 수로를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 시대 청주 일대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삼국이 힘을 겨루던 치열한 항쟁의 공간이었다. 이에 따라 청주 일대에는 삼국 시대에 축조된 다수의 성곽이 분포한다.
[자연지리적 환경]
청주는 소백산맥의 서사면과 차령산맥의 남사면 말단부에서 분기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청주시의 동쪽은 상당산맥이 뻗어 있어 산지를 형성하고, 서부와 남부는 저구릉지가 발달하여 있으며, 북쪽에서 남서쪽은 평야 지대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미호강과 청주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무심천이 여러 가지 하천 지형을 발달시켰다. 이로 인하여 청주의 지형은 기본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청주는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선상의 중앙에 있어 고대로부터 주요한 교통로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청주를 지나가는 7개의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와 큰 차이가 없다. 북으로는 진천-안성-용인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며, 서북쪽은 목천을 거쳐 천안으로, 서로는 전의[세종]를 거쳐 서해안으로, 동으로는 증평-괴산·음성-충주-제천을 거쳐 남한강 상류로 내지는 연풍에서 소백산맥[계립령]을 넘어 문경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서쪽은 강내-연기-세종-공주로 금강과 이어지며, 남쪽은 문의-회인-보은·청산-소백산맥[화령]을 넘어 상주로, 혹은 문의-옥천-영동-황간-소백산맥[추풍령]-김천을 거쳐 영남 지역과 통한다. 이처럼 지리적 요충지였던 청주에는 삼국 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축조된 여러 성곽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국가 형성기 청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정치체는 마한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은 50여 개의 크고 작은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청주 지역에는 마한의 소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청주 송절동유적[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부지 내]에서 500여 기가 넘는 주거지, 제철 유적 등과 같은 생산 시설이 갖추어진 대규모 취락과 함께 인근 구릉에 움무덤이 밀집하여 있음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소국의 존재 가능성이 높아졌다.
삼국 중에는 가장 먼저 백제가 한성기에 청주 지역을 차지하였는데,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서원(西原)이 비성(臂城), 혹은 자곡(子谷)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청주가 본디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인데, 혹은 낭비성(娘臂城), 혹은 낭자곡(娘子谷)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한성(漢城)[현 서울특별시 송파구]을 점령한 뒤 청주[현 세종특별시 남성골산성]와 대전[월평동유적]까지 남하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잉근내(仍斤內)[괴산], 금물노(今勿奴)[진천], 잉홀(仍忽)[음성] 등과 같이 일대에 고구려가 설치한 군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청주 지역의 군현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5세기 후반 신라 역시 소백산맥을 넘어 보은[삼년산성]을 거쳐 청주 문의 일대까지 진출하였으나, 백제 한성을 점령한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더 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고구려는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는 554년 관산성[현 옥천]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백제의 성왕이 전사하였고, 결국 신라는 청주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다만 백제 사비기 유물이 출토된 청주 부모산성이나 청주 석화리 목책성의 존재로 볼 때, 백제가 일정 기간 청주를 탈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대에 9주(州) 5소경(小京)을 설치하였는데, 청주에는 685년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다. 청주 주변은 웅주(熊州)에 속하였는데, 백제의 일모산군은 연산군(燕山郡)[현 문의]이 되었다.
이처럼 청주 지역은 삼국 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곳임이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삼국 시대 성곽의 분포 현황]
발굴 조사를 통하여 현재 삼국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청주 지역의 성곽으로는 정북동토성[청원, 백제·신라], 세종 남성골산성[옛 청원, 고구려], 청주 석화리 목책성[흥덕구, 백제 사비기], 부모산성[흥덕구, 신라·백제], 청주 양성산성[문의, 신라]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청주 일원에는 서림산성[천안-오창], 장자성[오창], 목령산성[오창], 낭비성[미원], 노고성[미원], 구라산성[미원], 동림산성[옥산], 동림리토성[옥산], 시루봉산성[옥산], 병마산성[강외], 낭성산성[오창], 저산성[강내], 작두산성[문의] 등이 삼국 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간략한 지표 조사만 이루어져 축성 시점 및 사용 주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청주 일대 산성의 변천 양상]
1. 한성기 백제
청주 외곽의 차령산맥 일원에는 삼국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여러 산성들이 분포한다. 대부분 오래전에 이루어진 지표 조사 당시 삼국 시대 혹은 백제 성곽으로 보고된 것들이다. 산봉우리에 축조된 산정식[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한성기 백제 성곽은 거의 대부분 토성이라는 점에서 이들 산성을 백제로 판단할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현재까지 청주 주변에서 발굴 조사된 한성기 백제 성곽은 증평 추성산성[옛 이성산성]이 유일하다. 추성산성의 성벽은 외부에 토제[흙으로 된 둑]를 설치하고 4~5차례 덧쌓아 축조하였다.
청주 부모산성과 제1보루 등에서는 한성기부터 웅진기 백제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으나, 부모산성의 현 석축 성벽은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부모산성에 인접한 봉우리에 있는 학천산성에서 백제 한성기 토기가 수습된다는 보고 등으로 볼 때, 부모산 일대에도 백제가 관방 시설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미호강 변의 정북동토성 역시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방형의 평지성은 대체로 시기가 늦고, 또 정북동토성에서 백제와 관련한 명확한 유구가 확인된 바가 없어 추가 논의가 어렵다. 다만 최근에 청주 인근의 천안 동성산성이 한성기 백제 성곽으로 밝혀진 만큼, 청주 지역에서도 한성기 백제 성곽이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2. 고구려의 남진과 남성골산성
475년 한성을 점령한 고구려는 안성을 거쳐 당시 백제가 급하게 천도한 웅진이 있는 금강 유역까지 남진하였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는 미호강 하류인 청원[세종] 남성골산성과 금강 남쪽의 대전 월평동유적[산성]이 있다. 남성골산성은 높이 106m 가량의 낮은 구릉에 조성된 목책성이다. 성벽은 2열의 목책 구조인데, 경사면에 마련된 바깥쪽 목책 열에는 일정 높이까지 할석을 쌓아 올려 목책 보강 시설을 만들었다. 산성에서는 목책 열로 된 방형의 치(雉)가 발견되었다. 문지 주변의 성벽은 목책이 아니라 돌을 쌓아 만들었다. 산성에서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각종 토기류와 철촉, 쇠도끼, 살포 등을 포함한 철기류, 그리고 금제 귀걸이 1점이 출토되었다. 고구려는 금강 유역을 통제하고 백제의 수도인 웅진 일대를 압박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남성골산성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산성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일대를 지배하기 위하여 거점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백제와 신라의 대립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하고 금강 유역으로 진출할 당시 청주의 동남쪽 일대는 소백산맥을 넘어온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는 5세기 후반 추풍령로와 화령로를 거쳐 보은-옥천-영동-청주 문의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들 지역이 모두 신라 땅으로 기록되어 있고, 470년 축조 기사가 전하는 보은 삼년산성이나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미천리 고분군 등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부터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가르게 한 관산성 전투가 있기 전까지 백제와 신라는 충청북도 옥천의 서화천을 경계로 마성산과 식장산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474년 축성 기사가 있는 일모성(一牟城)으로 비정되는 청주 양성산성 또한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축조되었다. 청주 양성산성은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 일원의 양성산의 정상부[높이 297m]와 주변 봉우리를 둘러 쌓은 둘레 985m 가량의 포곡식[계곡을 포함한] 석축 산성이다. 산성에는 성벽 안쪽으로 성벽을 따라 돌 수 있는 도로[內環道]가 확인되며, 문지[남문지, 동문지]와 수구(水口), 원형 집수 시설 및 여러 건물터가 확인된다. 산성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 토기 및 기와류, 나말여초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 자기, 기와류 등이 수습되었다.
한편, 청주 일대에서 고구려가 물러난 시기는 현재 분명하지 않다. 다만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대전 동부의 계족산 일대와 금산 지역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때 청주 부모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부모산성은 청주 흥덕구 일대 부모산[높이 231m]의 정상부와 주변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1,135m가량이다. 산성 주변 정상부에는 3개의 보루와 학천산성이 있다. 부모산성에서는 문지[북문지, 서문지]와 집수 시설, 배수구,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문지는 성벽 중간에 문이 설치되어 나무 사다리 혹은 나무판을 놓아야만 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신라의 전형적인 현문 양식이다. 부모산성에서는 ‘前’, ‘北’, ‘大’ 등의 글자가 새겨진 인장와(印章瓦)를 비롯한 선문 계통의 평기와와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 토기 역시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경의 신라 토기와 사비기 백제 토기가 모두 확인되고 있는데, 신라 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보면, 부모산성은 6세기 중후반에 신라가 청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축조되었으며, 7세기 대에는 백제가 다시 부모산성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청주 지역 재진출과 관련하여서는 청주 석화리 목책성의 존재가 주목된다. 청주 석화리 목책성은 미호강 강안 동쪽 얕은 구릉에 있다. 구릉 사면을 따라 조성된 1열의 목책 구덩이 안쪽에는 주거지 5기와 평면 원형에 단면이 플라스크 형태인 저장공 18기, 수혈 16기 등이 발견되었다. 1호와 12호 저장공 내부에는 탄화된 식물 유체가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사비기의 토기와 기와류가 출토되어, 성은 사비기에 백제가 청주 지역으로 재진출하면서 부모산성과 함께 미호강 수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청주 일원의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부모산성을 기준으로 하여 서쪽은 금강 수로를 통하여 진출하여 온 백제가, 동쪽은 소백산맥을 넘어 온 신라가 보은·옥천·영동-회인-문의-청주-진천·증평으로 이어지는 경로로 진출하여 영역화한 것으로 보인다.
4.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의 청주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 청주에 서원소경[경덕왕 대 서원경으로 개명]을 설치하고, 문의 일대에는 연산군(燕山郡)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청주를 비롯한 미호강 일대에는 군사적 긴장감이 사라지게 되었고, 청주는 지방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삼국 시대에 축조되었던 청주 일원의 수많은 성곽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새롭게 개편된 행정 치소인 서원경에 맞춰 배후에는 상당산성과 우암산성 등과 같은 새로운 성곽이 축조되었다. 신라는 서원경을 설치하면서 마한과 백제 이후 번성하였던 무심천 서쪽의 취락 대신 무심천 동쪽 평지에 새로운 계획 도시인 서원소경[서원경]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는 무심천 동쪽, 청주읍성 일원의 현 시가지에서 발견되는 통일 신라 시대의 각종 건물지와 담장, 도로 등을 통하여 확인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