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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산과 강에 새겨진 마을의 역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653
이칭/별칭 문산,일모산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관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의 대청댐 건설로 큰 변화를 겪은 문의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

문의면은 청주시의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보은군 회인면, 서쪽으로는 서원구 현도면남이면, 남쪽으로는 금강 본류의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보은군 회남면과 대전광역시 동구와 대덕구, 북쪽으로는 상당구 가덕면, 남일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청주시 남쪽의 산지와 금강 본류 사이에 있어서 산과 물에 둘러싸인 곳이다.

금강 본류를 중심으로 주변에 작두산, 양성산, 구룡산, 샘봉산 등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고, 임야가 전체 면적의 66.5%를 차지하는 등 청주시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곳이다. 문의면의 중앙부는 금강 본류가 흐르던 곳으로 지금은 대부분 수몰되어 대청호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농경지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낮다. 특히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은 남계리미천리, 노현리 일부를 제외하고는 드물다. 석회암 지대가 많아 마늘 농사가 잘되고 품질이 좋으며 표고버섯과 포도, 배, 딸기 등이 유명하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까지는 현재의 상당구 가덕면, 서원구 현도면, 세종시 부강면 등을 거느린 별도의 행정 구역인 문의군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전국의 지방 행정 구역을 통폐합할 때 청주군에 통합되었고, 문의면 지역은 용흥면과 양성면으로 분리되었다. 1930년에는 양성면과 용흥면을 통합하여 ‘문의면’이라고 하였다. 1946년 청주읍청주부로 분리됨에 따라 청원군에 포함되었고,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청주시가 통합되면서 상당구 문의면에 속하게 되었다.

[대청댐 건설과 문의면의 변화]

문의면은 1975년 3월 착공해 5년 9개월간의 공사 끝에 1980년 12월에 완공된 대청댐의 건설로 인하여 많은 것이 바뀌었다. 대청댐은 당시 충청남도 대덕군 신탄진읍과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사이를 막아 만든 댐이라 하여, 두 지역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청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덕군은 1989년에 대전시로 편입되었고, 청원군은 2014년에 청주시로 편입되어 이름은 사라졌지만, 대전광역시와 청주시의 머리글자는 변함이 없기에 ‘대청댐’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두 지역을 포괄하는 이름으로 유효하다.

댐의 규모는 높이 72m, 길이 495m, 만수 면적은 72.8㎢이다. 중력식 콘크리트댐과 사력댐으로 구성된 복합형 댐으로 본댐과 조정지댐, 그리고 저수지 내의 물이 다른 지역으로 넘치지 않도록 하여 주는 보조댐이 있다. 또한 충청권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도수로와 시설 용량 9만㎾의 수력발전소가 있다.

대청댐 건설로 생긴 인공적인 호수가 바로 대청호이다.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와 충주호 다음으로 큰 호수이며, 대전시와 청주시, 보은군, 옥천군에 걸쳐 있다. 대청댐의 건설로 가뭄과 홍수에 따른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주변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전력난을 해소하는 등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된 땅에서 살 수가 없었기에 고향을 등지고 생업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댐 건설로 충남과 충북 지방의 논밭 1500만 평이 물에 잠겼고, 4,275가구의 2만 5925명이 정든 고향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문의면에서는 법정리 18개 리 중에서 12개 리가 수몰지에 포함되었고, 73개의 자연 부락 중에서 35개가 수몰되었다. 문의면 전체 면적의 21%가 된다. 전체 2,295가구 중 44%인 1,031세대가 수몰 지역에 포함되어 1만 2786명 중 7,385명이 고향을 잃은 아픔과 슬픔을 얻게 되었다.

문산리후곡리, 가호리, 덕유리에 있던 마을들은 모두 수몰되어 인적이 사라졌고, 상장리, 둔덕리, 소전리, 신대리에 살던 사람 중 상당수가 수몰민이 되었다. 문의면 북쪽의 두모리, 도원리, 죽암리, 등동리, 남계리와 남쪽의 구룡리 등 6개 리는 금강 본류에서 떨어진 곳이라 수몰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수몰된 마을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기에 급격한 인구 이동이 일어났다.

후곡리가호리, 상장리에 이주민을 위한 마을이 건설되었으나 겨우 52세대가 이주하였고, 미천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한 공공 기관이 이주할 곳과 360세대 규모의 택지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수몰민 중 겨우 412세대만이 문의 땅에 남을 수 있었다.

대청댐 건설이 시작되던 1975년에 1만 3340명이던 문의 인구는 수몰 지역에 포함된 마을 주민들이 차츰 고향을 떠나게 되면서 계속 줄어들었다. 1976년 1만 2786명, 1977년 1만 2453명, 1978년 1만 2812명, 1979년 1만 43명으로 줄어들었다. 댐 건설이 완료된 1980년에는 인구가 급감하였다. 그 결과 전체 주민 중 42%인 5,586명이 실향민이 되어 객지로 떠났고, 남은 사람은 7,754명뿐이었다.

[문의면의 마을]

문의면은 현재 22개 법정리와 34개 행정리로 이루어졌다. 1980년 금강의 물길을 막은 대청댐이 준공되고 대청호가 생기면서 많은 마을이 물 밑으로 사라졌고, 금강 물줄기를 따라 났던 길도 사라져 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 오가던 길이 사라지면서 어떤 곳은 오지가 되고, 육지 속의 섬이 된 곳도 있다. 그 결과 생활권이 바뀌게 된 마을이 생겨났고, 주민들의 편의에 따라 행정 구역도 조정되었다.

대청댐이 완공된 후 2년 뒤인 1982년에 면 서쪽의 죽암리가 떨어져 나가 현도면 소속이 되었다. 1989년에는 보은군 회북면 마동리, 마구리, 묘암리와 회남면 염티리가 문의면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는 가덕면 노현리가 문의면에 편입되었다. 1개 리가 현도면으로 빠져나가고, 5개 리가 문의면으로 들어온 결과 1980년에 18개였던 법정리가 1990년에는 22개로 늘어났고, 관할 지역 면적도 75㎢에서 93㎢로 늘어났다.

1980년 대청댐의 준공과 함께 줄어든 마을 수만큼 급격히 줄어든 인구는 계속 줄었다. 객지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수몰민들이 생계를 이을 방법이 막막하여지자 외지로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문의면의 중심지였던 문산리에 살던 사람 중 일부가 미천리의 새로운 터전으로 이주하였지만, 집이 생겼을 뿐이었다. 생업을 이어가던 농토를 마련하지 못한 이주민들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문의를 떠나 도시로 나가야만 하였다. 1980년 7,754명이었던 주민 수는 불과 5년 만인 1985년에는 6,584명으로 줄었다. 이후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리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2000년에는 6,000명 선이 무너져 5,886명으로 줄었고, 2013년에는 4,889명,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된 2014년에는 4,755명으로 줄었고, 2023년에는 3,725명이 되었다.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 문의의 중심은 문산리였다. 조선 시대까지 문의현 관아가 있었고, 장이 서던 곳이었다. 이후 문의면 소재지가 되어 행정, 교통, 교육, 경제의 중심지였다. 수몰 전에는 286가구, 2,046명이 살던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 거주민이 없으며 산기슭에 조성한 문의문화재단지대청호미술관이 있을 뿐이다.

상장리는 179가구, 1,303명이 살던 마을이었지만, 179가구 중 139가구가 수몰되어 1,183명이 떠나고 40가구, 120명만이 남았다, 미천리는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서 8가구만이 수몰되었고, 이주 단지가 만들어져서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학교 등이 이전하여 문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버스터미널, 식당, 상점 등이 밀집하여 있어 대청호 관광의 중심지로서 성장하였다. 가호리는 샘봉산 남쪽의 마을로 삼면이 금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청댐 준공으로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78가구, 541명의 주민이 모두 이주하였다. 후곡리도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168가구, 1,099명의 주민이 모두 이주하였으나, 미수몰지에 한옥 마을을 조성하여 24가구가 이주하였다. 덕유리 역시 마을 전체가 수몰되어 163가구, 1,117명의 주민이 모두 이주하였다.

신대리는 102가구, 540명의 주민 중 84가구, 478명의 주민이 이주하였고, 1983년 청남대 조성으로 인하여 나머지 주민들도 모두 이주하였다. 소전리는 소전1구는 모두 수몰되어 47가구, 209명의 주민이 이주하였고, 소전2구는 36세대, 340명의 주민이 이주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거주하였다. 문덕리는 문덕1구는 38가구 중 4가구가 수몰되어 33명만이 이주하였고, 문덕2구는 74가구 중 56가구가 수몰되어 435명이 이주하였다. 괴곡리산덕리, 품곡리는 각 3가구씩 수몰되어 이주하는 등 큰 변동은 없었다.

북쪽의 두모리, 도원리, 등동리는 대청댐 수몰과는 관계없는 지역으로 지금도 오지에 속한다. 그리고 청주 도심과 가까운 남계리는 논밭이 비교적 넓은 지역이다. 가덕면에서 편입된 노현리청남대 입구에 있는 마을로 두루봉 구석기 유적을 찾았던 곳이고, 작은 용굴 등의 동굴유적이 아직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 마구리, 마동리, 묘암리, 염티리는 원래 보은에서 편입된 지역으로 산세가 높고 경치가 빼어나다. 구룡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청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일찍부터 문의에 터를 잡고 거주하여 온 집성촌이 많았다. 그러나 수몰로 마을이 없어지면서 주민들의 상당수가 외지로 떠났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집성촌이 유지되기 어려웠다. 수몰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덜 겪었던 괴곡리에는 연안 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구룡리에는 낙안 오씨와 경주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남계리에는 청주 한씨, 밀양 박씨, 성주 배씨, 보성 오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노현리에는 강릉 김씨, 은진 송씨, 청주 한씨, 연안 이씨 등이 살고 있으며, 도원리에는 보성 오씨파평 윤씨, 경주 김씨 등이 골고루 섞여 살고 있다. 두모리에는 경주 김씨와 부안 임씨, 양천 허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등동리에는 단양 우씨, 청주 정씨, 청주 경씨, 청주 이씨, 의성 김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구리에는 경주 최씨안동 권씨가, 마동리에는 하음 봉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묘암리에는 경주 이씨, 김해 김씨, 파평 윤씨가 많고, 미천리에는 동래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타성들이 많이 들어왔다. 산덕리는 영산 신씨 집성촌으로 유명하며, 소전리김해 김씨경주 이씨, 수원 백씨 등이 살고 있다. 염티리품곡리, 후곡리에는 여러 성씨들이 섞여 살고 있다.

[수몰민의 아픈 마음]

1980년 7월 수몰민의 이주가 완료되었을 때, 77세대는 도시의 공단으로 취업하여 이주하였고, 239세대는 경기도 평택 등 남양만 간척지 등으로 이주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나 미천리 등 이주 단지로 이사한 세대는 대청호 아래에 잠긴 농토를 더는 경작하지 못하고 일부 남은 농토에서 농사를 짓거나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야 하였다. 또한 새로 조성한 이주 단지에 집을 짓고 이사하느라 빚을 낸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에는 정부가 국책 사업을 진행하면서 토지와 생업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몰민의 대부분은 집과 농토를 내어주고도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스스로 찾아야만 하였다.

대청호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생기면서 선착장도 만들고 배도 띄우면서 청주와 대전 사람들이 놀러 와 즐길 수 있는 국민 관광지 조성을 꿈꾸었다. 1980년 2월 정부에 미천리 일대를 국민 관광지로 지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1980년 11월 대청호와 주변 지역이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문의면 번영회를 조직하여 대응하였다. 그 결과 1982년 6월에는 대청호 내에 여객선 운항이 허가되는 등 새로운 생업 수단이 일부 마련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1983년 6월 신대리에 대통령 전용 별장인 영춘재가 건설되면서 국민 관광지 개발 계획마저 취소되었다. 영춘재는 1986년 7월 청남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민들은 국민 관광지 지정을 촉구하고, 이주로 인하여 생긴 채무 경감을 요구하면 상가를 철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러나 청남대 준공 후인 1984년 3월에는 여객선 운항이 옥천군으로 제한되는 등 나아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청남대가 국가 1급 경호 시설이 되고, 상수원 보호 구역이 확대되면서 개발 행위가 제한되고, 오염원이 될 수 있는 관광선 운항, 음식점, 축산업 등이 각종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이후 계속되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위로 그쳤다.

그나마 일부 성과를 거둔 것은 문산리문의문화재단지를 만든 것이다. 1992년 기본 계획을 마련하여 1997년 야외 박물관이 준공되었다. 대청댐 수몰 지구에 있던 문의현 객사인 문산관을 비롯하여 문의와 당시 청원군 관내의 전통 가옥 등을 이전 복원하여 야외 전시장을 만든 것이다. 대청호가 바라보이는 문산리 양성산 기슭에 조성하여 탁 트인 전망과 대청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청주와 대전을 비롯한 전국의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문의 지역 개발에 걸림돌이 되었던 청남대는 2003년 4월 대통령의 전용 별장으로의 기능을 마감하고, 20년 만에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20년 동안 대통령만이 이용할 수 있던 미지의 정원이 주민들의 품에 돌아오면서 문의문화재단지와 함께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문의문화재단지의 조성과 청남대의 민간 개방은 대청댐의 수몰과 함께 고향과 생업을 잃었던 수몰민들의 오랜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그렇지만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인하여 각종 규제와 개발 제한 등으로 불이익을 받아 온 수몰민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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