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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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이칭/별칭 | 유학(儒學),공교(孔敎)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이영수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인천 향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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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 공자(孔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또는 종교.
[개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로, 시조인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삼강오륜(三綱五倫)[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의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통틀어 이른다]을 덕목으로 하고 사서삼경(四書三經)[『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네 경전과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세 경서를 이르는 말]을 경전으로 하는 유교는 우리나라에서는 넓은 의미에서의 종교로 통용되고 있다. 유교의 종교적 측면은 경천사상(敬天思想)에서 볼 수 있는데, 경천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재하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절대 신을 높여 존경하고 사모하는 숭경(崇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 시대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전래를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면,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일 것이다. 삼국이 유교를 받아들인 시기는 다르지만, 유교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직, 법령의 제정, 국사의 편찬, 교육 제도의 설립, 학술 문화의 진흥, 보국애민 정신의 고취, 국제 외교의 성취, 미풍양속과 윤리 도덕 등 고대 한국의 건설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치적·교육적·윤리적 측면과 경사(經史)[경서(經書)와 사기(史記)]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가 발달하였다. 고려의 유교 문화는 태조에서 의종까지가 진흥기 내지 융성기에 해당한다면, 명종에서 공양왕까지는 유교 문화의 퇴락과 침체기를 거쳐 주자학 시대가 열리는 전환기에 해당한다.
조선에 들어와서 유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士禍)와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 시대의 모습을 일신(一新)하게 된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經世論)과 도학(道學)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현재 유교는 불교와 기독교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종교의 하나로 꼽힌다. 유교는 종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영향이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인천 향교]
향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 교육 기관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에 있는 인천 향교는 1990년 11월 9일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인천 향교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그 밖에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976년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삼문(三門) 등을 보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7칸의 명륜당, 각 10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앙으로 하여 안자(晏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홍유후(弘儒侯) 설총, 문성공(文成公) 안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간공(文簡公) 성혼, 문성공(文成公) 이이,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경공(文敬公) 김집,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동서로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인천 향교는 첫째 사람의 도리를 익혀 자기의 마음가짐․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유학 교육의 기능, 둘째 공자와 그 제자, 그리고 우리나라 선현께 제사 드리는 제향의 기능, 셋째 지역 사회에 유학의 도를 널리 알려 교화시키기 위한 선행 표창, 성년례, 기로연(耆老宴), 청음 명륜 장학 사업 등의 지방 문화 센터로서의 기능과 그 밖에 각종 전통 예절 지킴이로서의 기능 등 종합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산 서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위치한 학산 서원은 인천 관내에서 유일한 서원이었지만, 원격(院格)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듯하다. 1870년(고종 7)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없어진 구 서원이다. 『인천광역시사』에 의하면, 1980년도에 문화재들을 일괄 조사할 때에도 그 흔적에 대해, “학산 서원지(鶴山書院址)는 도천현(禱天峴)에서 삼호현(사모지 고개)으로 오르는 중간 길 우편에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석과 석계(石階), 와편(瓦片) 등이 흩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밭이 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학자]
학산 서원에는 이단상(李端相)[1628~1669]과 그 아들 이희조(李喜朝)[1655~1724]가 배향되어 있다. 이단상의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의 손자이자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 2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이조 정랑과 병조 정랑을 거쳐 청풍 부사를 지냈다. 1664년(현종 5)에 인천도호부 부사로 부임하였다. 홍명하, 송준길 등에 의해 경연관으로 추천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양주 동강(東岡)[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락산 일대]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열중하다가 4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희조는 부제학 이단상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이다. 이희조는 조선 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인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동궁 서연관(東宮書筵官)[왕세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 등을 거쳐 대사헌과 참판 등을 지내고, 경종 초년의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의 연좌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죽었다.
이희조는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지 28년이 지난 1697년(숙종 23)에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 부임했는데, 『농암집(農岩集)』 권 24, 인민당기에서 “이곳은 나의 선부(先父)께서 부사를 역임한 고장이라, 선부의 치적이 아직도 남아 있거늘, 내가 정사에 능하지 못하여 부로(父老)에게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면목으로 선묘(先廟)를 배알할 수 있으며, 또 나의 노모를 안도하게 해 드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대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