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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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遠洋漁業 |
영어의미역 | Deep-sea Fishery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석봉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로부터 며칠 또는 수십 일 걸리는 먼 바다에서 하는 어업.
[개설]
수산업법시행령 제28조에 ‘우리나라의 동해·서해 및 북위 25도선 이북, 동경 140도선 이서의 태평양 해역을 제외한 해역을 해외 어장이라고 하고, 이 어장에서 하는 어업을 원양어업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여수 원양어선의 역사는 천일화학 사장인 김영준이 해방 후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원양어업회사를 창설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으로 희생되어 진출하지 못했다. 1971년 제중병원 유경식 박사 집안의 배가 라스팔마스에 입항한 적이 있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여수시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여수수산고등학교가 있어 원양업계의 유능한 선장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첫 진출한 시기는 1966년이며 남태평양 사모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선구자들은 여수수산고등학교 40회 김기평 선장과 43회 정기영 선장, 해군장교 복무를 마치고 1969년 스턴 트로러(stern trawer) 제11일동호 선장이 된 김광부 등이다.
두 번째 선구자 부류는 오늘날 동원그룹의 초석을 닦은 선장들로서 여수수산고등전문학교 1회인 박길하·서용환·이영찬 등이며, 선장으로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여수수산전문대·여수수산대학 출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어업인 참치선망업에서 선장 겸 어로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원양어업 기지는 현재 부산항이 사용되고 있지만,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 53여억 원이 투자되어 1978년 8월 준공한 국동어항단지는 차관 목적에서 원양어업 전진 기지로 지어졌다고 한다. 원양어업 기지로서 부산항이 포화 상태가 되자, 1977년에 수산청에서 여수국동어항단지에서 입·출항하라고 각 선사에 공문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공청회에서 여수 시민들의 반대가 심하여 백지화되고 말았다. 여수 지역의 조선업·수산업의 도약, 원양업계와 대학 간의 산학 협력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