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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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場市 |
이칭/별칭 | 장,정기 시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정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00년대 후반 - 전국적으로 장시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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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0년대 - 의병이나 만세 시위 등 민중 운동의 중심지 역할 담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대 이후 - 상업의 주도권을 상설 시장에 넘기고 대부분의 장시가 쇠락함 |
소재지 | 가래비장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업리 |
소재지 | 동도천장 -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큰시장 |
소재지 | 신천장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
소재지 | 광릉천장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소재지 | 의정부장 -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1동 |
[정의]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 정기 시장의 변천.
[개설]
조선 후기에 들어와 활성화되기 시작한 각 지방의 정기 시장을 장시, 또는 장이라고 부른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각전조(各廛條)에 “행상이 모여서 교역하고는 물러가는 것을 장(場)이라고 이른다”라고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지방을 떠돌며 상업에 종사하는 장꾼은 이미 백제 가요 「정읍사」에 나타나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의미의 장시는 15세기에 전라도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이후 전국 1,000여 곳으로 확대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장으로 열려 지역의 주민들이 각자 생산한 상품을 교역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행상인 보부상이 장을 순회하며 각지의 물산을 공급하였고, 거래 감독관인 감고(監考), 상품 중개업자인 중도아(中都兒) 등의 장시 종사자와 함께 여각(旅閣)을 중심으로 도매, 위탁 판매, 창고업, 금융업, 중개업 등의 전문적인 경영 형태도 출현하였다.
[양주 장시의 형성]
양주는 서울에서 경흥으로 이어지는 경흥대로와 원산으로 나가는 삼방로가 관내를 지나가고 한강 수운과 임진강 수운을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어 일찍이 장시가 활성화되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장시가 발달하여 가업장, 동도천장, 신천장, 미호장, 대탄장, 구곡장, 덕소장, 광릉천장 등에서 큰 규모로 물산이 거래되었다. 또한 삼방로와 경흥대로가 만나는 누원점(樓院店)이 유명하였다.
[양주 장시의 변천]
장시가 활성화되면서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특정 물산이 집중 집산되는 장시가 나타나고 이 장시에 모이는 상품을 매점 매석하기도 하고 난전이 활성화되면서 이에 대한 단속권을 행사하려는 육의전을 비롯한 서울의 관상(官商)들과 난전(亂廛) 상인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양주에서는 특히 경흥대로와 삼방로가 상로로 부상하면서 원산 등에서 매집된 북어가 누원점에서 일부 상인에게 매점 매석되어 물의를 일으킨 예가 있었다.
관전과 난전의 갈등은 정조 대에 이르러 관전의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해제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이루어지면서 일단락되었고 이후 송우장, 누원점 등 양주의 장시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1914년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부터 새로이 의정부장의 역할이 커지는 반면 가업장, 신천장 등은 쇠퇴하게 되었고, 육로가 활성화되면서 미호장, 구곡장, 덕소장 등의 한강 나루터 장시들 역시 쇠락하게 되었다.
[현황]
근대에 들어 도시가 팽창하면서 상설 시장이 출현하게 되자 기존의 장시들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규모가 축소되었다. 현재 양주 지역에서는 가업장, 덕정장, 신산장 등이 소규모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