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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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樓院店 商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도남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의 누원점(樓院店)에서 활약한 사상인(私商人).
[개설]
양주의 누원점은 함경도로부터 한양으로 올라오는 모든 물산의 집산지였으며, 18세기 이후 한성부의 시전 상인을 위협하는 유통의 거점이었다. 동북 지방에서 생산되는 북어(北魚)·마포(麻布)와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면포(綿布) 등이 누원점에서 활발하게 교환되면서 누원점의 상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사상의 등장 배경]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은 유통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고, 용산, 마포, 서강, 양화진, 한강진 등의 경강상인이 중요한 상업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8세기 후반, 지금까지 유통업을 주도하던 봉건적 경제 체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도고 상업(都賈商業)인 매점(買占) 상업이 대두하게 된다.
경강상인들도 자신들의 근거지가 전국의 물화가 집결되는 곳임을 인식하고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물화들을 손쉽고 재빠르게 매점하는 한편,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상품이 운송되는 도성 가까이까지 상권을 확장시켜 갔다. 그리하여 비교적 규모가 큰 사상 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경강상인들의 상품은 미곡, 소금, 생선, 건어물, 목재, 시탄(柴炭), 직물 등 다양하였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지역적으로 다소 전문화되고 있었다.
한편,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전국적인 시장망이 형성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품의 수요가 증대되고,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어 상품의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들의 활동 중심지는 도성 안에서는 칠패(七牌)[지금의 서소문 부근], 이현(梨峴)[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4가 부근] 등지였고, 근교 지역에서는 용산, 서강, 마포, 송파를 비롯한 한강 주변과 양주의 누원점, 포천의 송우점(松隅店) 등지였다.
[누원점의 등장과 발달]
서울 주변에서 사상인들의 활동이 많았던 이유로는 지방의 상품이 서울로 운반되는 길목이었다는 점과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적용되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시전 상인들과 사상인(私商人)들 사이에는 심각한 상권 분쟁이 일어났다.
사상 도고가 활동하고 있던 주요 거점은 한강 주변을 비롯하여, 송파·누원점·송우점 등 서울 외곽 지대에 발달한 상업 중심지였다. 이 지역들은 지방의 생산품이나 물자가 서울로 반입되는 길목이었고, 시전의 금난전권 밖에 있으면서도 서울과 비교적 가까워서 도성 내의 사상 도고와의 연결이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사상 도고가 직접 상품을 매점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 양주목은 수도 한성부와 인접해 있으면서 동북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양주목을 거쳐 함경도로 통하는 길 뿐만 아니라 평강의 삼방곡(三方谷)으로 통하는 길과 낭천의 주소령으로 통하는 길, 회양 법수현으로 통하는 길이 새로 개척되었다. 삼방곡로는 덕원 및 안변 등 함경도 지역에서 한성부로 오는 지름길이었으므로 함경도 지역 상인이 자주 통행하여 길이 평탄하게 되었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에서 생산된 쌀이나 어물, 면포, 과일 등은 양주목을 거쳐야만 수도 한성부로 유입될 수 있었다. 또한 삼남 지방에서 생산된 면포 등의 의류도 양주목을 거쳐야만 동북 지방으로 갈 수 있었다. 결국 양주목의 사상인들에 의해 수도 한성부의 경제가 영향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고, 양주 지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이 바로 누원점이었다.
[누원점의 위치와 역할]
누원점은 동북 지역인 원산과 함경도 경흥 서수라(西水羅)로 가는 길 초입에 위치한 유통로의 중심지였다.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道路攷)』에 의하면 한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로는 한양~수유리점~누원점~서오측점~축석령~송우점~파발막~장거리~만세교~양문역~풍전역~가오개령~장림천~김화~금성~창도역~재오현~송포강~신안역~회양~청령~고산역~용지원~남산역~안유~원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양주 누원점은 이들 도로 가운데 한성부 인근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사신들의 행차 시에도 숙박은 서화랑(西花浪)·녹양(綠楊)·양주읍참(楊州邑站)에서 하면서도 항상 점심만은 누원점에서 먹고 있는 사실로 볼 때, 양주 누원점은 물산의 집산처이면서 다양한 먹거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함경도 원산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포천과 의정부를 통해 서울로 가는 상품 교역길이 번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관문인 양주에 누원점이라는 상점이 생기게 되면서 다락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곳 다락원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의 물품이 집하되어 서울로 반입되면서 중간 상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원산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건어물을 사재기해 두었다가 서울 상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거나 상품을 공급하지 않아 서울 상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하기도 하였다. 누원점은 상누원(上樓院)과 하누원(下樓院)으로 번창하였는데 상누원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이고 하누원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이다.
도봉산 기슭에 형성된 누원점은 동북 지방 물자의 중간 집하장으로서, 서울의 상권을 흔들어 놓기도 하였다. 누원점을 무대로 활동하던 상인들은 동북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어 등 각종 상품을 쌓아 놓고 난매(亂賣)하였다. 특히 돈 많은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은 북상(北商)과 결탁하여 누원점에 물품을 대량으로 쌓아 놓고 도산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