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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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綠楊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학수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의정부시 녹양동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고대 이래 고려·조선 시대에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녹양역(綠楊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 관내 견주 지역에 속해 있으면서 개경(開京)에서 양주[남경] 방면을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평구도(平丘道) 관할의 역 가운데 하나로서 한양에서 포천 방면을 연결하는 대로역(大路驛)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녹양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외교 사행의 영송(迎送), 군사의 왕래 등 국가의 공적 행위가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는 교통·통신 기구 역할을 하였다.
[관련 기록]
『성종실록(成宗實錄)』[10권, 2년 4월 11일]에 병조(兵曹)에서 양주(楊州) 녹양역, 포천(抱川) 안기역(安奇驛), 영평(永平) 양문역(梁文驛)의 역리(驛吏) 등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녹양역 등 세 역(驛)은 강원도(江原道)·영안도(永安道) 두 도의 요충인 까닭으로 지난 갑진년에 녹양으로부터 강원도 은계(銀溪)에 이르는 무릇 9역을 통할하여 한 도를 삼아서 찰방(察訪) 하나를 두었는데, 을유년에 이르러 녹양역 등 세 역을 평구도에 붙이고, 은계는 별도로 한 도를 삼아서 찰방 둘을 두게 되니, 그 폐단이 점점 많습니다. 청컨대 구례(舊例)에 의하여 은계도(銀溪道)를 다시 붙여서 찰방 하나를 두어 그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구례대로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 양주목 역원]에는 “평구역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한 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안기(安奇)·양문(梁文)·봉안(奉安)·오빈(娛賓)·쌍수·전곡(田谷)·백동(白冬)·구곡·감천(甘泉)·연동(連洞) 등이다. 녹양역은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역원 부발참(附撥站)]에는 “녹양역은 시북곡면(柴北谷面)에 있는데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고 관북직로(關北直路)의 두참(頭站)이며 평구도 소속으로 말[馬] 10필, 이속[吏]과 남자 종[奴]이 44명, 여자 종[婢]이 28명”이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 시대 때 녹양역은 수도 한성과 강원도·영안도[함경도] 방면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1424년(세종 6)에는 이 방면 교통로 상의 역들의 이해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양역을 강원도 은계역(銀溪驛)을 중심으로 한 은계도(銀溪道)로 편성하였다. 이후 녹양역은 1465년(세조 11)에 평구도 소속이 되었는데, 1471년(성종 2)에는 그로 인한 폐단이 크다 하여 다시 은계도의 역으로 편성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평구도 소속이 되었다.
역 내지 역참은 조선 후기에 들어 역마(驛馬)를 함부로 이용한다든가 역전(驛田)의 사유화 등으로 인한 폐단이 가중되어 그 기능이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자,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擺撥)을 설치, 이와 병행하여 운영되었다. 양주의 평구역을 중심으로 한 평구도와 그 소속의 녹양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