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00 |
---|---|
한자 | 平丘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학수 |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평구역(平丘驛)은 고려 시대에는 남경[양주]에서 평창이나 봉화 방면으로 갈 수 있는 평구도(平丘道)의 중심 역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찰방(察訪)[종6품]이 소재하는 평구도의 중심 역으로서 한양(漢陽)·양근(楊根)·지평(砥平)·홍천(洪川)에 이어지는 역로와 평구역에서 가평(加平)·한양·양주(楊州)·포천(抱川)·영평(永平) 등에 이어지는 역로의 소관 11개 역을 관할하는 중로역(中路驛)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평구역은 다른 지역의 역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등 교통·통신 기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평구도의 중심 역으로서 해당 역로망과 그 소속 역들을 관리 감독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82, 병지 참역(站驛)]에 “평구도는 30개 소를 관할한다. 평구(平丘) 남경(南京), 봉안(奉安) 광주(廣州), …… 유동(幽洞) 감천(甘泉), 도심(道深) 봉화(奉化)”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기 양주도호부]에 “역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이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 양주목 역원(驛院)]에는 “평구역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어 본도의 속역 열한 곳을 찰방하는데, 녹양(綠揚)·안기(安奇)·양문(梁文)·봉안·오빈(娛賓)·쌍수·전곡(田谷)·백동(白冬)·구곡·감천·연동(連洞) 등”이라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역원 부발참(附撥站)]에는 “평구역은 금촌면(金村面)에 있는데 동쪽으로 70리 떨어져 있고 관동직로(關東直路)의 두참이자 본역(本驛)인 까닭에 관우(館宇)가 있으며 말이 9필, 이속이 24명, 남자 종이 44명, 여자 종이 9명”이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05년(태종 5)에는 경기도관찰사의 보고에 따라 평구역승(平丘驛丞)을 다시 두었고, 1457년(세조 3)에는 이조의 건의로 각 도 역의 관할을 조정하고 정역찰방을 두게 하였는데, 이때 평구역은 구곡역·쌍수역 등과 함께 경기·강원도 정역찰방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1506년(연산군 12)에는 평구역을 덕연(德淵) 옆으로 옮겨 설치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한양에서 춘천 등 관동(關東) 지방에 이르는 직로(直路)에 있으면서 이 역로망의 중심 역이었던 평구역에는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말이 9필, 이속이 24명, 남자 종이 44명, 여자 종이 9명이 속해 있었다. 역 내지 역참은 조선 후기에 들어 역마(驛馬)를 함부로 이용한다든가 역전(驛田)의 사유화 등으로 인한 폐단이 가중되어 그 기능이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자, 명나라의 예에 따라 파발(擺撥)을 설치, 이와 병행하여 운영되었다. 평구역과 평구도는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