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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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상태 |
[미추홀구청의 표지석]
"인천광역시 남구청의 종합 민원실은 경주 김씨(慶州金氏) 인천 여우실[如意室] 문중의 종가(宗家)가 있던 곳이다. 인천의 경주 김씨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인 김균(金稛)의 3세손인 김종(金宗)이 1450년경 한양에서 여우실(현 숭의동)로 이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가의 터전으로 18대가 한 자리를 지켜왔다. 특히 지역 출신의 최다선 국회의원으로서 제11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은하(金殷夏)는 그 16대 손이 된다. 이제 종가 터가 시민의 종합 민원실로 변모하여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기에 남구청과 학산 문화원에서는 남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명가의 종가 터임을 되새기는 표석을 세운다. [2004. 9. 14,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박우섭/남구 학산 문화원 원장 유재환]"
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민원실 입구에 세워진 여우실 경주 김씨 종가 터 표지석의 내용 일부이다. 표지석은 단순하게 어떤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의 평가에 대한 지표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수령들은 자신들이 부임했던 고을에서 떠날 때 ‘영세 불망비’, ‘선정비’ 등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남겨 놓고 떠난다. 원래 이런 비석은 선정을 베푼 수령이 떠나는 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쉬워하면서 자발적으로 그를 기억하고자 세우는 것이다. 그런 선정비가 수령들의 치적으로 치부되기에 어김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남겨진 이들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이름을 쳐다보며 두고두고 욕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문이 밥 먹여주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나름대로의 전통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긍지일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그러한 가문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긍지는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고 이 사회를 지켜 주는 또 다른 힘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이런 표지석에 먹칠을 하는 일들이 없었기에 온전하게 그 표지석이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전통사회의 모습을 너무나 부정적이고 획일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분명 우리와 가까웠던 시기의 전통사회인 조선 왕조가 가부장적 유교 질서에 입각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전통사회를 봉건적이니, 유교 사회니 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백안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인가? 왜 이런 사고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느 사회나 모두가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를 겪었다. 바로 일제 강점기를 지나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제에 의해 치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일제가 우리를 지배했던 방식이 얼마나 철저하고 지독한 것이었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지배의 영향은 현재의 우리에게 잘못된 민족의식과 문화와 전통의 왜곡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이다. 식민지의 유산은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그런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전통시대에 대한 평가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여우실에 뿌리를 내리다]
2005년에 『인천 일보』에서 ‘인천의 종가·명가’라는 기획 기사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여우실[如意室]에 터전을 이루고 살았던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소개되었다.
경주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고 조선 왕조 개국 공신인 계림군 김균(金稛)을 파시조로 하고 있다. 계림군의 장자인 맹성(孟誠) 희경공파의 후손들이 여우실[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세거(世居)한 것이다. 처음 여우실에 자리를 잡은 입향조(入鄕祖)는 맹성의 아들인 김종(金宗)[1420~1480]이었다. 김종이 1450년경 한양에서 여우실로 이거한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가의 터전으로 18대가 한 자리를 지켜 왔다. 특히 지역 출신의 최다선 국회의원으로서 군부 독재 시절 야당의 6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제11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김은하(金殷夏)[1923~2003]는 그 16대손이다. 인천의 경주 김씨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209번지 일대에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줄곧 여우실을 지켜 왔다.
인천광역시 연수구에서 인주 이씨[인천 이씨]가 고려 시대 7대 어향을 이룬 명가로 이름을 날렸다. 원인재[인주 이씨 이허겸의 사당]라는 인천 지하철의 역 이름도 가질 정도로 대표적 가문이기도 하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바로 이 경주 김씨 가문을 명가로 드러내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것이다.
김은하의 동생이며 인천의 원로 언론인, 향토사가인 김상봉은 언제가 이런 표현을 하였다. “제가 어렸을 때까지 늘 거기서 사는 동안에 제가 자랑으로 생각했던 게 있어요. 제 본적하고 현주소가 전 같으니까요. 숭의동 209번지는 종자 어른의 4대손인 시자 중자 어른이 처음 자리를 잡았어요.” 어림잡아 500여 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여우실도 세월의 변화를 이기지는 못하고 1996년 여우실 종가와 사당이 헐리고 그 자리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 종합 민원실이 들어섰다. 아쉬움만 남기고 500여 년의 흔적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여우실의 추억–나눔의 생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2동의 옛 지명이 여우실, 여의실로 불리는 유래는 확실치가 않다. 여우가 많아서라고 또는 한자 표기대로 ‘뜻대로 마음대로 되는 곳’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도 확언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여우실에서 김동수(金東洙)와 최동조(崔東助)는 김대천(金大川), 김경하(金敬夏), 김중하(金重夏), 김은하(金殷夏), 김상순(金相順), 김상봉(金相鳳)의 5남매를 낳았다. 김대천과 김상순은 여식이다. 이 형제들은 모두 숭의 초등학교 출신이다. 숭의 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인천 대화 공립 보통학교였다. 1937년에 개교한 이 학교는 1946년에 숭의 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96년에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꿀 때 숭의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인천 대화 공립 보통학교는 창녕 공립 보통학교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와 생긴 것이다. 인천 대화 공립 보통학교가 만들어지자 김동수는 큰아들인 김경하에게 학교가 생겨서 우리 집안 애들이 다 거기 가서 공부하게 되는데 문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며 교장을 만나 학교에서 필요한 것을 해 주도록 하였다. 들리는 말로는 그 학교의 교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 같은 교육에 대한 집안의 열의는 경하가 1952년 초대 민선 교육 위원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개성 사범 학교가 인천으로 피난을 내려와 숭의 초등학교 교사를 빌려 개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인천에서는 개성 사범 학교 유치 위원회가 구성이 되고 김경하가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개성 사범 학교가 부지가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경하는 자신의 땅을 일부 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 경인 교육 대학교가 인천 교육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여우실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선친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자식으로 대물림하면서 오늘의 경인 교육 대학교를 만들어 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열정은 그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동수는 여우실 주변의 농사를 계획적으로 하였다. 밭에서 재배하는 작물의 경우 획일적으로 심는 것이 아니라 집안 식구들에게 땅의 성질에 맞게 적절한 품종을 지정하여 심도록 했다. 같은 품종으로 농사지어, 자칫 잘못되어 몽땅 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에도 움막에서 농사를 하였다. 당시 겨울이면 적당한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은 시절, 땅을 파서 움막집을 지었다. 겨울철 큰 수익이 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었다. 움막집을 짓고 거기에 불을 피워 파를 기르도록 한 것이다. 가을에 밭고랑에 심어 놓은 파를 움막 안으로 들여와 겨울철 건양파로 비싸게 팔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이 움파에 맥을 못 출 정도로 좋아했다고 하니 그 상품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김동수는 서리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먹고 다닐 수 있도록 서리용으로 일정 구역을 정해 놓고 모든 사람들에게 꼭 그렇게 하도록 엄명하였다. 가을에 아이들의 무 서리로 작인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 자식도 남의 집 농사지을 때 서리 다 하고 먹고 자랐어. 그러니까 애들 [서리]하거든 야단하지 말고 다 먹으라고 해. 아주 속까지도. 속이 더 맛있다.” 이렇게 해서 인천 대화 공립 보통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아주 편하게 당당하게 서리를 해서 주린 배를 채웠다.
베품은 남자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미곡 창고 회사에서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마구간을 만들었다. 이 마구간에서 남부역 앞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외국인들, 주로 영국인 포로들이 작업을 하였다. 외부에 철망을 치고 마구간 공사를 하는데 여름철에 점심때가 되면 경주 김씨 집안 누나들, 아주머니들이 감자를 삶아서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아이들은 철망 사이로 낮선 이방인들에게 그 감자를 건네주었다.
김동수는 자기 집에 와서 농사를 짓는 누구에게나 일정 기간 동안 농사를 짓고 그만 두면 반드시 살림집 한 채와 그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이런 삶의 모습 덕에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른바 자본가로 낙인 찍혀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도 무탈하게 지날 수 있었다. 전쟁으로 가족이 모두 피신을 갔을 때, 도움을 받았던 정 씨라는 노인은 텅 빈 집을 매일 순행하기도 하고 그 자식이 해코지를 할 때 나서서 막아 주기도 했단다. 또 집에 공산군이 들어와 인천시 인민 위원회가 접수를 하고 바깥채는 병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때 좌익의 우두머리 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서 김동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 노인이 나서 “그 어른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고”라고 해서 역시 무탈하게 집안을 보존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바로 여우실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 모두가 자신만이 아닌 모두를 생각하는 공생의 삶을 살아 온 결과인 것이다. 이 같은 집안의 삶이 이후 야당 국회의원으로 6선을 하는 인물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 아닐까?
군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기에 야당 국회의원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6선을 하고, 인천을 야도(野都)로 만들었다. 의정 활동에서 한결같이 교통 체신 위원으로 자리를 지킨 것은 어떤 뚝심일까? 부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음에도 ‘032’로 인천과 같은 지역 번호를 사용하고 있는 연유도 김은하의 노력이었다. 김은하가 뚝심이 대단한 정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여우실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실에서는 1년에 제사가 열두세 번이다. 여기에 할머님들 생신, 아버지 생신, 가을이면 고사도 지낸다. 고사 지내면 고사 시루가 일곱 시루였단다. 이런 살림살이를 꾸려 나간다는 것이 얼마 고된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실의 막내인 김상봉은 “고사를 지내면 제가 죽어납니다. 집안 내에 다 돌려야 해요. 제가 막내니까요.”라고 하며 당시를 떠올렸다. 김상봉은 인천의 원로 언론인이며 향토사가 이다. 평생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 왔다. 인천의 언론 문화 체육 활동에서 김상봉의 활동은 어느 곳 하나 빠지는 곳이 없다. 자신을 버리면서 오직 내 고장 인천만을 위해 이렇듯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김동수의 자식들은 모두 인천에서 내로라할 만한 역할들을 하였다.
[여우실의 후손들]
경주 김씨의 후손들은 김경하 형제들의 인천에서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않았기에 종가를 지탱할 만한 경제적 여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6선의 국회 의원을 배출한 집안에서도 여우실을 지킬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대지 1983.47㎡[600여 평]의 땅에 부과되는 세금을 부담할 여력이 없었다. 현실은 이들로 하여금 여우실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인천을 떠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꼼수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았기에 기꺼이 여우실을 내어줄 수도 있었으리라. 김은하 의원 추모비도 인천광역시는 원하는 곳에 어디든지 세워주겠노라 했어도, 자신들의 선영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