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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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始作- |
영어공식명칭 | Ttangkkeut Village, New Beginning Not The End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민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이 국토 순례 1번지가 되기까지의 변화 과정.
[작은 오지마을 갈두에서 국토 순례 1번지가 된 해남 땅끝마을]
해남 땅끝마을이 한반도의 남쪽 땅끝이라는 사실은 몇몇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국경위도에는 우리나라의 남쪽 기점을 땅끝 해남현으로, 북쪽 기점을 함경북도 온성부로 잡고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를 천 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 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땅끝마을은 우리나라 국토의 가장 마지막 지점이다. 마을을 굽어보는 땅끝전망대에서 동남쪽 아래로 500m쯤 내려가면, 이곳이 땅끝임을 가리키는 땅끝탑이 서 있다. 하늘을 향해 긴 세모꼴을 하고 있는 땅끝탑은 1987년 7월 18일 세운 것이다.
땅끝마을에서 해발 156.2m에 이르는 사자봉 정상에는 횃불을 상징하는 38m 높이의 땅끝전망대가 있다. 땅끝전망대에 서면 인근 다도해가 발 아래 보이며,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볼 수 있다. 사자봉이란 사자의 머리 형상을 하고, 정상의 서쪽에 있는 포구가 마치 포효하는 사자의 입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썰물이 되면 드러난 바위들이 마치 사자의 혀 모양을 하고 있어 성난 사자가 먹이를 겨냥하는 모습이 된다. 사자봉의 땅끝전망대 부근에는 진도, 완도, 제주도를 연결하는 갈두산봉수대가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 올 정도로 갈두산봉수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과 사자라는 형상에 더하여, 사자봉 정상의 전망대에 불이 켜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사자의 눈으로 간주한다. 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먹이를 포획하려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한반도 땅끝이 마침내 바다를 향하여 포효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대양으로 나아가는 형국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풍수지리적인 해석은 마을 주민들이 땅끝이 과거의 ‘오갈 데 없는 갈두’에서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땅끝마을은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일출과 일몰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땅끝탑에서 서쪽은 바위로 된 해안과 사자포구를 거쳐 갈산마을을 지나면 해남 송호리 해송으로 유명한 땅끝송호해변으로 연결된다. 동쪽은 통호리와 사구미해수욕장을 지나 북평면 남창리까지 연결된 해안도로로 이어진다. 바다 건너에는 완도의 흑일도, 백일도가 방파제처럼 막아 서 있다.
해남읍에서 땅끝마을까지의 거리는 해남-완도 사이의 4차선 확포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약 40㎞로 짧아졌다. 교통편은 직행버스가 매일 약 20회 운행하면서 목포와 광주까지 직접 연결하고 있으며, 군내버스도 운행하고 있다. 노화도와 넙도, 그리고 보길도로 연결하는 여객선은 100톤급 페리선을 포함하여 총 5척이 매일 오전 7시부터 인근 섬으로 주민과 관광객 그리고 화물을 수송한다. 여름 피서철에는 땅끝항을 이용하여 보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급증하여 매 30분 간격으로 여객선을 운항한다. 노화도의 사량진항으로 매일 4대의 여객선이 총 26회 운항한다. 그래서 노화도와 보길도 주민에게 땅끝마을은 광주나 인근 목포로 가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작은 오지마을이었던 갈두는 1979년 ‘토말’이라 명명되고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지만 관광객의 눈길을 받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도에 땅끝으로 개명되면서 관광객의 순례지 혹은 답사지가 된다. 땅끝은 아픈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하여 찾는 곳으로 또는 암울했던 과거를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찾는 곳이기도 하다. 땅끝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대학생들과 땅끝의 상징과 의미를 찾는 탐방객들이다. 땅끝마을은 국토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출발지이자 종착지가 되고 있다.
[바다를 일구던 땅끝마을 사람들]
땅끝마을은 김해김씨 경파와 밀양박씨 규정공파가 같은 시기에 이주해 와 지금까지 16대에 이르고 있다. 양 성씨는 집안 간 혼인하여 인척관계로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양 성씨는 마을에서 중대사가 발생하면 하나로 단합하여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한다. 1980년대 초 어촌계가 형성될 당시 마을 가구의 80% 이상을 두 성씨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후 김 양식업과 관광서비스업에 종사하기 위해 땅끝마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지만, 마을에서 두 성씨는 여전히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어업을 생업으로 삼아 왔다. 마을 주변에 있는 농토는 협소하여 여기서 생산한 식량은 자급자족할 수준에도 턱없이 못 미칠 정도였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에도 김 양식을 했었다고 하지만, 거의 모든 가구가 주요한 생업으로 김 양식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라고 한다.
1960년대의 땅끝마을 주민들은 노 젓는 1톤 미만의 소형 어선을 이용하여 3~4명이 협업으로 추자도 앞바다까지 나가 주낙을 하였다. 땅끝마을 주변에서 잡히는 살아있는 새우를 통에 담았다가 낚시에 미끼로 끼워 바다에 던지는 방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낚시를 했다. 당시 주로 잡은 어종으로는 농어, 숭어, 오징어, 전어 등이었다. 잡히지 않는 고기가 없었을 정도로 어획량이 많았다. 만선을 한 경우에는 마을사람들이나 이웃마을 주민들에게 생선을 도매로 넘겼다. 생선을 도매로 넘겨받은 사람들은 외지로 이고지고 나가 소매로 팔았다. 그때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여 생선의 판로가 원활하지 못해 잡아온 생선을 파는 문제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팔지 못하는 고기는 일부 말리기도 하고, 일기가 좋지 못하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썩어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땅끝마을 선착장 앞에서 통호로 이어지는 바닷가를 중심으로 전복 양식장이 늘어서 있고, 주변 해역에서는 전복의 먹이로 이용되는 다시마와 미역을 양식하고 있다. 방파제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물목, 즉 땅끝과 완도의 흑일도, 백일도 사이의 바닷물의 유속이 빠른 곳으로 어촌계원 일곱 가구가 정치망을 설치하여 멸치잡이를 한다. 여기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은 봄·가을에는 새우, 여름과 초가을에는 멸치가 있다. 흑일도와 백일도와 땅끝마을 사이의 바다는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어족자원이 풍부하며,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으로 땅끝마을 주민에게는 바다농사의 터전인 셈이다.
[어업에서 관광업으로 변모하는 생업]
사자봉 정상에서 ‘토말’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다. 과거부터 있던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오지였던 마을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마을 사람들의 열망이 더해진 것이었다. 어찌됐든 ‘토말’이라는 표식이 발견되었다고 홍보되었고, 그렇게 마을은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토말을 드러내고 또 기념하기 위하여 1981년 해남군청에서 토말비를 전망대에 세웠다. 그리고 백두산과 함께 국토의 양끝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반도의 최남단인 토말임을 알리는 비를 세우고 언론의 홍보가 이어지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방문이 늘어났다. 1994년 토말 대신 땅끝으로 바꾸자는 결정이 내려졌고, 토말탑이 땅끝탑으로 바뀌었다.
어업이 주였던 땅끝마을이 한반도의 땅끝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인해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마을 주민의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땅끝마을과 보길도를 여객선으로 연계하면서부터 땅끝의 관광지화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마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마을이 관광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업은 여전히 마을 주민들 생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총 98세대 가운데 32세대가 어촌계에 가입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어업과 상업을 겸하고 있다.
마을의 어가들 대부분은 부인이 관광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남편은 물때에 맞추어 바다에 나가 새우잡이, 멸치잡이, 전복 양식과 삼치잡이 등을 병행하고 있다. 마을에서 13가구는 여전히 어업에만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관광지로 발전하기 전부터 현재까지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전복 양식을 병행함으로써 어업 소득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계절별로 봄에는 주로 새우잡이, 봄에서 초가을까지는 멸치잡이를 한다. 마을에서 새우잡이는 20가구가, 멸치잡이는 7가구가, 전복 양식업은 10가구가 종사하고 있다.
땅끝마을의 관광은 1월 1일 해맞이축제로부터 시작된다. 4월부터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하여 5월 무렵에는 절정에 이른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계절은 봄이다. 여름방학 기간에는 보길도를 찾는 피서객들과 답사 관광객들이 땅끝을 찾아온다. 땅끝을 찾는 관광객의 1/2 정도는 보길도를 향한다. 10월과 11월까지도 땅끝을 관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수는 봄 관광객의 1/3 수준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연인들이 크리스마스에 땅끝을 찾아들고 있어서 사계절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또한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 해넘이와 1월 1일 해맞이는 마을 청년회와 부녀회를 중심으로 땅끝해맞이 축제추진위를 중심으로 축제의 난장을 진행한다. 땅끝 해맞이축제는 전국에서 새해 일출을 땅끝에서 맞이하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땅끝마을이 순수한 어촌에서 관광지가 되면서 도시의 유흥가를 연상케 하는 상가들이 갖추어져 있다. 관광지의 기반시설이라 할 수 있는 식당, 숙박업, 주차장, 매표소, 유람선 등을 비롯하여 슈퍼마켓, 단란주점, 술집이 혼재하고 있다. 또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건어물과 활어를 판매할 수 있는 상점과 가판대들이 이곳저곳에 들어서고 있다. 여기에서 판매하고 있는 수산물은 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외부에서 판매용으로 들여온 것들도 섞여 있다. 마을 내에 혼재하고 있는 각종 서비스업체들은 관광지로서의 땅끝마을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국토의 끝에서 희망의 시작을 여는 땅끝마을]
땅끝마을 갈두는 우리나라 국토의 마지막 지점이다. 땅끝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해남을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다. 땅끝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고 땅끝탑과 땅끝전망대 등이 세워지고 땅끝마을 전체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국내 관광객 조사에서 전남에서 가고 싶은 곳 1위로 손꼽이고 있다.
땅끝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통일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의지를 다지기 위해 땅끝마을에서 국토 순례를 시작하거나 마치고 있다. 또한 땅의 ‘끝’에서 한 해의 ‘끝’을 마감하고 새해의 첫 일출을 보면서 한 해를 설계하려는 관광객들 역시 찾아온다. 1990년대 초반 땅끝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1993년 출간된 유홍준의 책에 소개된 땅끝에 대한 소개와 감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문화운동은 정체성 회복과 민족문화의 부흥에 매진하였고 그 첨병에 유홍준과 김지하가 있었다. 유홍준과 김지하가 땅끝을 소개하고 땅끝을 시의 소재로 삼으면서, 정치적인 압박에 직면한 젊은이들과 민중들에게 ‘땅끝’이라는 낱말은 민족문화를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어가 되었다. 그 후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저러한 답사단체가 국토순례를 기획하면서 땅끝은 국토순례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 되었다.
국토의 시작점 땅끝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가지고 국토순례를 한다. 매년 국토순례를 위하여 8,000여 명이 땅끝을 찾는다. 제각기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한반도 최남단 땅끝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땅끝마을에서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