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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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東書聖金生先生-遺物遺跡 |
영어의미역 | Relics and Remains of Haedong Seoseong Master Gim Sae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서동형 |
[개설]
김생의 글씨는 풍운의 조화와 사람으로서 신(神)의 경지에 이른 필치라는 평을 받고 있다. 충주에서는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추대하여 우륵문화제 때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1996년에는 김생연구회가 조직되어 김생의 서예를 연구·전승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생의 진품 유적을 찾을 길은 없고, 단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경상북도 봉화군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어 그 모습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외에도 경주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백율사 석당기(栢栗寺 石幢記), 대로원 편액(大櫓院 扁額), 만덕산 편액(萬德山 扁額), 백련사 편액(白蓮社 扁額), 금강산 유점사 편액(金剛山 楡岾寺 扁額), 불상의 복장 유물로 나왔다는 금자사경(金字寫經), 화엄경 석각(華嚴經 石刻) 등이 모두 김생의 글씨라고 전하기는 하나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김생서(金生書)라고 하여 전하는 전유암서(田遊巖序)·사성절보(四聲絶寶)·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등도 인본(印本)으로 전하고 있다. 1999년 봄에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 서명구 묘비와 2000년 봄에 이곳에서 얼마 안 되는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에 있는 조계 묘비가 모두 김생 집자비로 확인되었다. 글씨가 매우 선명하여 서체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김생의 자취를 찾아서]
김생은 신라 통일기의 명필(名筆)로 서성(書聖)으로도 불리고 있다. 자(字)는 지서(知瑞)이며 별명은 김구(金玖)라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반송에 김생이 세웠다는 절 터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그 조상의 친족 계통을 알 수 없다. 711년(성덕왕 10)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다른 공부는 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도록 붓을 잡고 글쓰기를 쉬지 않았으며, 이에 예서(隸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도 때때로 그의 진적(眞蹟)을 볼 수 있는데 학자들이 전하여서 보물처럼 소중히 여겨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宋)에 들어가서 변경(忭京)[하남성 개봉]에 묵고 있을 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사관(舍館)에 와서 그림 족자를 썼다. 이때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오늘 뜻밖에 왕우군(王右軍,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 줄이야!’하고 감탄하였다. 그러자 홍관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신라의 김생이 쓴 것이요.’ 라고 말하니, 두 사람은 웃으며, ‘천하에 왕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런 묘필(妙筆)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이에 홍관은 여러 번 김생의 글씨라고 하였지만 끝내 믿지 아니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김생의 필적을 구하여 보배처럼 소중히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글씨 공부하는 이는 많으나 김생의 글씨를 본받아 쓰는 이는 적다. 그러나 학사 홍관은 김생의 필법을 본받아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남겼다고 하였다.” 『미수기언(眉首記言)』에는 “그는 나뭇가지로 땅을 긁으며 운필법을 익혔지만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 고 하였고, 『과재집(果齋集)』에는 “김생이 토굴 속에서 나뭇잎에 마구 글씨를 썼기 때문에 낙엽과 시냇물이 새까맣게 변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보아 김생은 출신이 낮아서 생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80여 세를 살면서 글씨 공부에만 전념하였을 뿐 그밖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에 여러 가지 전해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안동의 문필산(文筆山), 경주의 경일봉(擎日峰) 석굴 같은 곳에서 글씨 공부를 하였으며, 음성의 원통산(圓通山) 기슭에도 김생암(金生庵)이 있어 이곳에서도 글씨를 썼다고 『음성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 불우(佛宇)조에는 북진(北津)의 언덕에 김생사(金生寺)가 있음을 기록하고 『삼국사기』김생조를 옮겨 놓고 이 절에서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하였으므로 김생사(金生寺)라 이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진은 금가면 동남쪽 유송리(일명 반송)에 있었던 나루 터이며 또한 절 터 강변의 긴 석축의 제방을 김생제방(金生堤防)이라 부르는 점 그리고 이 지역의 전설 등을 미루어 볼 때, 김생과 이곳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알 수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行寂)[832~916]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신라 말 고려 초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곤(崔仁滾)[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端目) 승려가 집자(集字)하였다. 비음기는 낭공대사 법손(法孫)인 순백(純白)이 짓고, 각자승은 숭태(崇太)·수규(秀規)·청직(淸直) 등이다. 입비(立碑)는 신라 말 경명왕(景明王) 때 세란(世亂)으로 세우지 못하였다가 954년(광종 5)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비신 높이 200㎝, 폭 96㎝로 31행, 2,573자에 이르며, 글자 한 자의 지름이 2~3㎝이다.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처음에는 경상북도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지만 폐사가 된 후 방치되었다가 1509년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자민루(字民樓)로 옮겼다. 1918년 비신만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김생 서예 연구의 보고(寶庫)이다.
[서명구 묘비(徐命九 墓碑)]
서명구 묘비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蘇屹邑) 송우리(松隅里)에 있다. 서명구(徐命九)[1692~1754]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우경(虞卿), 호는 약허(若虛)이다.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722년(경종 2)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宦官)을 시켜 세제(世弟, 후일 영조)를 죽이려 하자 이를 탄핵하여 음모를 막았다. 영조가 즉위하자 강원도도사를 지냈으며, 그후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731년(영조 7) 승지 등을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74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의금부동지사를 지냈다. 1752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과중한 조세 부담을 삭감하게 하고 관하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척결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후에 행사직(行司直)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했고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서명구 묘비는 김생 집자비로 구전되어 오다가 1999년 봄에 동방서법대학원 정상옥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비신의 높이는 175㎝, 폭은 67㎝, 두께는 31㎝이고, 한자의 지름이 2.1~3.3㎝이다. 1791년에 세워졌고, 묘갈명은 형조판서겸홍문관예문관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지었다. 비신 전면은 석봉 한호의 글씨, 후면과 좌우 측면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두전은 당대의 이양빙의 글씨로 각석되었다. 2000년 초 묘소 이장에 따라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곡천리 산숫날로 옮겨졌다.
[조계 묘비(趙棨 墓碑)]
조계 묘비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에 있는 조계(趙棨)[1702~1754]의 묘비이다. 2000년 4월에 김생연구회의 노력에 의해 김생 집자비로 확인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세워졌으며, 서명구 묘비와 2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 보이는 서품보다 매우 선명하고 필획이 정교하여 김생체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비이다.
[이현서 묘비명(李玄緖 墓碑銘)]
2004년 11월 김생연구회와 가평문화원이 함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소재 이현서 묘비명(李玄緖 墓碑銘)을 현지 조사하여 김생 집자비임을 확인했다. 이현서 묘비명은 종래 알려진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는 물론 조계 묘비·서명구 묘비와도 서체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는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매우 많은 김생의 글씨가 남아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현서 묘비명은 모두 1,480여 자이다. 아들 이근필(李根弼)이 1863년에 건립하였고, 1862년에 이현서 자신이 짓고 집자한 것이다. 이현서 묘비명은 조계 묘비, 서명구 묘비 등과 함께 글자 수가 매우 많아 김생의 서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김생의 글씨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서첩으로 전하고 있다. 목각하여 인출하여 탁본한 것으로 글씨로 된 행서체이다. 처음에 산가서 5엽이 있고 뒤에 오행시 1편이 있다. 산가서 말미에 ‘보덕사 김생서’라 한 것으로 보아 한때 보덕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목각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각자하는 사람의 기능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12월 30일 원광대학교 서예학 전공 조수현 교수에 의해 고서화 수집가 김인기의 소장 자료에서 9엽으로 된 새로운 자료가 소개되었다.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는 전유암이 산가(山家)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쓴 글이다. 일찍이 홍양호(洪良浩)[1724~1802]도 이 서첩을 얻어 귀중하게 소장하고 있었다 한다.
[사성절보(四聲絶寶)]
한자의 발음에는 평성·상성·거성·입성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사성절보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서 200자를 골라 같은 운자끼리 모아 놓은 것으로, 사성을 알기 위한 둘도 없는 보배란 뜻이다. 그러나 사성이나 운자를 알아보기 위한 체계적인 특성은 없으며, 다만 발음(종성 받침)이 같은 글자를 같은 운자에 속하는 것끼리 모아서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성절보는 사성을 배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는 데 편리하도록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에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석을 새기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기 때문에 이에 편리하도록 구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김생서 4종류]
머리 부분에 ‘김생서’ 라고 기록한 4종류의 종류의 글이 있다. ① ‘우군본청진’으로 시작되는 시구가 있으니 왕희지 일화를 읊은 시이다. ② 태백산으로 시작되는 글이 있다. ③ 조향로로 시작되는 이백의 망노산폭포시의 일부를 집자한 글이 전한다. ④ 감호유수로 시작되는 이백의 시를 쓴 것으로 역시 일부를 집자한 글이다. ③과 ④는 『대동서법(大東舒法)』에 전하는 것으로 자유분방하면서 매우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본래는 이백의 시를 완전하게 썼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일부가 망가진 것을 볼 만한 부분만을 후대 사람이 집자하여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생 금자첩(金生 金字帖)]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고 있는 금자사경(金字寫經)이다. 4절 7면으로 된 1첩으로 19.3×10.2㎝이다. 해서체로 매우 정교하고 당시의 필법을 엿볼 수 있는 활달한 필체를 나타내고 있다.
[김생봉서 금자사경(金生奉書 金字寫經)]
대전의 채수황의 소장 자료로 명주에 옻칠을 한 위에 해서체로 쓴 금자사경이다. 머리 부분에 불상을 그리고 그 옆에 ‘신라국김생봉서상중하’ 라 하여 표지의 성격을 나타내고 본문을 시작하는 세 편의 불경이다. 1행에 4자, 4행을 한 장으로 하여 여러 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활석으로 추정되는 돌함에 넣어 보존되고 있다. 함의 크기는 11~13×13~13.9㎝이다.
상(上)은 법성게로 화엄경을 간략하게 풀이한 것으로 말미에 또한 ‘김생봉서’라 하고 끝을 맺고 있으니, 모두 14매이다. 중(中)은 화엄경악찬게로 화엄경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53매에 수록하고 있다. 하(下)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으로 “여리실견분제오 정신희유분제육 무득무설분제칠 의법출생분제팔 일상무상분제구 장엄정토분제십”의 전문을 67매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표지와 같은 불화가 29매 있는 것으로 보아 김생은 불화도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김생 서체와는 다른 필의를 보이고 있다. 사경시 재료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거나, 김생의 젊었을 때 글씨로 보이기도 한다.
[백율사 석동기(栢栗寺 石憧記)·이차돈 순교비(異次頓 殉敎碑)]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나, 원래는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 기슭 백률사에 있었다. 제작 연도는 813년(헌덕왕 10)경으로 추정되며, 육면의 화강암으로 된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높이 1.04m이며 각 면의 넓이는 0.29m이다.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법흥왕 14)에 순교한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우나, 이 동기(憧記)의 법첩이 전하고 있어 상당 부분을 보완하여 주고 있다. 서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모양을 띠고 있어 특이하다.
[원화첩(元和帖)]
이 원화첩은 12자씩 28행인데 비문과 순서가 다르게 법첩으로 되어 있다. 특히 세 번째 장은 2002년 12월 22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김생 유허 집자비(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5[김생로 325])의 전면에 복원되어 있다.
[사내문고 소장(寺內文庫 所藏)]
일본 야마구치현 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데라우치 문고 중 한국 관련 희귀 전적류 등 135점이 1996년에 경남대학교에 기증된 바 있다. 이 중에 김생의 글씨가 한 점 있었다. 한말에 3대 통감을 지내고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게[1852~1919]가 강탈해간 수많은 전적 문화재를 그의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6년에 야마구치현 현립대학에 기증·보관되어 오던 것 중 일부이다. 반환된 135점의 문화재는 주로 조선 후기인 16~19세기의 작품인 간첩·시첩·서화첩 등 귀중한 전적류들로서 역사학·한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들이다.
[창림사비(昌林寺碑)]
창림사는 경주시 배동 남산 기슭에 있었던 절이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 터에는 삼층석탑과 쌍두귀부(雙頭龜趺) 및 석등연화대좌(石燈蓮花臺座) 등이 남아 있다. 귀부 위의 비신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이 비가 당대의 명필인 김생의 글씨라고 전한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만덕산에 있으므로 만덕사라고도 하였다. 이 사찰의 대웅전 안의 서쪽 벽에 ‘만덕산’, ‘백련사’라 쓰여 있는 거대한 두 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이 현액은 매우 오래되어 좀이 먹어 삭은 상태이다. 만자의 길이가 44㎝며 석자의 길이는 110㎝나 된다.
이 여섯 자의 글씨가 김생의 글씨라고 『이계집(耳溪集)』에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백련사’ 액의 좌측면에는 다른 쪽의 좁은 판자를 대어 붙인 위에 행서체로 ‘신라성덕왕시김생필적차사천기백년전래경위수묵도분차편결허유감천만이’라 새겨져 있으나 오래되어 훼손되었음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백련사의 창건을 839년(문성왕 1)이라 추정하고 김생의 사후에 세워진 것이라 하여 부정하려는 견해도 있으나, 오히려 절의 창건 연대를 올려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화엄경 석경(華嚴經 石經)]
화엄경 석경은 보물 제104호로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에 있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대사가 화엄사의 삼층 법당이었던 장육전을 세울 때 주위에 석각의 화엄경을 둘렀다고 『봉성지(鳳城誌)』에 기록되어 있으나, 화엄사의 조성 시기를 일반적으로 경덕왕(742~765) 이후로 보고 있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 그러나 석각의 글자체가 거의 해서이고 서법으로 보아 왕희지체(王羲之體)를 쓰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김생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 화엄사가 불타면서 산산조각으로 파손되어 돌무더기로 방치되어오다가 일제 말기 각황전 증수시에 수습하여 상자에 담아 보관하였다. 6·25전쟁 때 또 다시 상자가 파손되어 석경이 노천에 퇴적되어 오던 것을 1961년에 다시 정리하였다. 석경편은 1만 4천 점에 달하며, 이들을 대·중·소로 나누어 163상자로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다.
[대로원액(大魯院額)]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대로원(大魯院)은 경주의 남쪽 6리에 있으며, 김생의 글 대로원(大魯院) 석 자가 있다.”고 하였다. 홍양호는 ‘제백월사비(題白月寺碑)’ 말미에서 “내가 일찍이 김생의 글씨를 탐하여 계림에서 대로원(大魯院)의 작은 편액과, 강진에서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라는 여섯의 큰 글자를 보았고, 또 전유암서(田遊岩序) 및 흥인거(興隣居)의 인본을 얻어서 모두 집에 간직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 데서 이 편액이 근세에까지 전해왔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마곡사 대웅전액(麻谷寺 大雄殿額)]
마곡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泰華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640년(선덕여왕 9)에 자장(慈藏)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이 절의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의 편액이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오고 있다.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 안의 암각자]
충청북도 보은군 어암리 삼년산성 안의 바위에 ‘아미지(蛾眉池)’·‘유사암(有似巖)’·‘옥필(玉筆)’ 등을 새긴 암각자(岩刻字)가 있다. 이것이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오고 있다. 글씨가 좋아 탁본을 많이 하여 바위가 검게 되어 있을 정도이다.
[충주 김생사지(忠州 金生寺址)]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 65-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김생사(金生寺) 터이다. 충주 김생사지는 김생이 만년에 창건한 사찰의 터로 주변에 장대석이 많고 석탑재, 와편, 도자기편이 산재해 있다. 이곳을 와당 밭이라고 일컫을 정도로 와전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충주 김생사지는 『수산집(修山集)』의 「김생사중수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북진애(예성의 북쪽나루), 즉 현 위치의 김생사에서 두타행을 닦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년 전까지 있었던 고와가의 본체 용마루에서 ‘건융을미(1775)’의 망와 4점과 ‘성상오십일년을미충청도충주’의 암기와가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사찰로 추정되며, 근래까지 조선시대의 고가 터가 남아 있으며 1979년 당시 두 채의 건물이 ㄷ자 형태로 있었다. 절 터의 서쪽 강가에는 김생이 쌓았다는 김생제방이 있다. 김생제방은 강물에 의한 토양 침식을 예방하고 사지의 평탄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쌓았던 것으로 40~50㎝ 정도의 길이에 높이 3~4m 규모로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자취를 찾기 힘들다.
[의의와 평가]
충주시는 김생연구회와 함께 충주 김생사지의 사적지 지정을 위해 집자비 건립, 선양동산 조성 계획 수립, 김생사지 발굴 및 지표 조사, 김생서첩 발간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충주불교총연합회와 힘을 모아 충주 김생사지를 문화재로 지정·복원하고 김생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선양 사업에 나서 불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충주시는 충주 김생사지가 충청북도 문화재(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됨에 따라 지표 조사를 마치고 발굴 조사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