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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관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721
한자 薛灌洙
영어음역 Seol Gwan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대표경력 창원청년단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1919년 당시 창원면 중동리에 살았던 설관수는 상남면 토월리에 살던 배중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읍내 중동 청년회관에서 여러 사람과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는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적당히 줄여 공도수(孔道守)에게 맡겨 500여 매를 등사하게 하였다. 이때 송석민김호원은 태극기 500여 매를 만들었다.

3월 23일 설관수는 주동자와 더불어 창원보통학교에 있는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6,0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진압을 위해 마산 주재 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 등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경찰의 무차별 체포로 이날 시위에서 31명이 체포되었다. 장날인 4월 2일에도 창원읍에서는 2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서 많은 사람이 구금되었고, 그 중 20여 명이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설관수는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마산감옥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후 설관수송석민과 더불어 1920년 6월 창원청년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12월 5일 안준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남면청년회와 더불어 초기 창원시내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창원청년단은 1922년 5월 이후 어느 시기에 창원청년회로 명칭이 바뀌어 1927년 11월까지 존속했다. 설관수는 1925년 4월 창원청년회를 비롯한 7개의 청년단체가 중심이 된 창원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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