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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724
한자 裵重世
영어음역 Bae Jungse
이칭/별칭 단정(丹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토월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창원시 토월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5년 12월 18일연표보기
몰년 1944년연표보기
본관 분성
대표경력 의열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배중세는 1895년(고종 32) 12월 18일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상남동에서 아버지 배기홍(裵基洪)과 반남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1910년에 김해김씨 김달근(金達根)의 딸과 결혼했다.

[활동사항]

배중세는 1919년 3·1운동 당시인 4월 3일 진전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검거하기 시작하자 그 해 5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갔다. 1919년 11월 길림성에서 김원봉·황상규·한봉근 등 12명의 동지와 함께 의기투합한 뒤, 만세를 부르는 소극적 운동보다는 강력한 힘으로 일제의 침략 근거지를 부수고 침략자와 일제의 추종자를 처치해야 한다는 김원봉의 주장에 따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처음 조직된 기간 단원은 배중세를 비롯해 13명이었으며, 김원봉이 단장이 되었다. 이 후 행동준비를 위해 곽재기·이성우와 함께 폭탄제조법 등을 그 해 겨울까지 연구·습득했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어 폭탄 및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로 운송하였다. 이 후 밀양으로 가서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파계획을 돕고,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에 들어와 있던 양건호·곽재기 등과 함께 총독부·동양척식회사·식산은행 등의 정보를 살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경기도 경찰에 의해 1920년 8월에 체포되어 1921년 5월 23일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베이징·상해를 거점으로 의열단 활동을 하다가 국내 공작임무를 띠고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

이 후 배중세는 경상북도 달성군 노곡동에서 양건호와 동거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정보 교환을 하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1925년 11월 5일 자신의 집에서 양건호 등과 함께 일을 하다가 기습한 경찰에 검거되어 ‘경북폭탄사건’이라 불리는 의거계획이 좌절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1926년 12월 23일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또다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1월에 다시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고문과 옥고를 견디지 못해 1944년 1월 23일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대구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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