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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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喬岳 |
이칭/별칭 | 백첨(伯瞻),석음와(惜陰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정덕 |
출생 시기/일시 | 1653년 - 이교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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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6년 - 사마시 합격, 순안 현령 |
활동 시기/일시 | 1705년 - 알성시문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06년 - 전라우도 암행어사 |
활동 시기/일시 | 1706년 - 전라우도 암행어사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706년 - 정언으로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707년 - 문학, 정언 |
활동 시기/일시 | 1710년 - 삭직, 정주에 유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 - 부수찬, 부교리, 수찬 |
활동 시기/일시 | 1714년 - 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좌승지, 수원부사, 황해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718년 - 대사간 |
활동 시기/일시 | 1720년 -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721년 - 경산에 유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722년 - 동래로 옮겨짐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예조 참의,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형조 참판 |
활동 시기/일시 | 1726년 - 경기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727년 - 예조 참판, 대사헌, 사임,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728년 - 이교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71년 - 신도비 건립 |
유배|이배지 | 경산 - 경상북도 경산시 |
유배|이배지 | 동래 - 부산직할시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행촌[살구골]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용인 |
대표 관직 | 대사헌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교악(李喬岳)[1653~1728]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노론계 문신이다. 석음와(惜陰窩)라는 이교악의 호는 ‘배우는 데 힘쓰고 시간을 아껴 매사에 부지런히 하라’는 뜻으로 송시열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경종의 즉위와 세제인 연잉군의 집정 문제로 소론과 대립하였고, 정국의 변화에 따라 관력(官歷)에 부침(浮沈)이 있었다.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 고조할아버지는 병조 정랑으로 직제학에 증직된 이신충(李藎忠), 증조할아버지는 정선 군수로 집의에 증직된 이영인(李榮仁), 할아버지는 좌승지에 증직된 이사익(李士益)이며, 아버지는 호조 참판에 증직된 이후망(李後望)이다. 어머니는 송담록(宋覃祿)의 딸이다. 손자는 이의노(李宜老)이다.
[활동 사항]
이교악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같은 회덕[현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어려서 송시열의 자손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696년(숙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순안현령에 부임하였고 1705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지평이 되었다. 1706년(숙종 32)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제수되었으나 서계(書啓)[벼슬아치가 임무를 끝내고 올리는 보고서]에 ‘죄를 지어 죽임을 당한 장(張)에게 작호(爵號)를 붙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1706년 정언(正言)으로 복직하였고, 1707년(숙종 33) 문학(文學)과 정언에 제수되었다. 1710년(숙종 36) 3월 13일 지평 이방언(李邦彦)과 함께 소론 최석정(崔錫鼎)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최석정을 삭직(削職) 후 도성 밖으로 추방하고 주자(朱子)의 해석을 따르지 않은 그의 책 『예기유편(禮記類篇)』을 불사르며, 그를 변호한 윤회(尹淮)도 관직 명부에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최석정을 유배 보내야 한다는 유생 곽경두(郭景斗)의 상소문을 읽고 임금이 노하자 홍우서(洪禹瑞), 이택(李澤) 등과 함께 곽경두를 옹호하였다. 이 일로 삭직당하고 정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12년(숙종 38) 이후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을 지내고 1714년(숙종 40) 승지, 1716년(숙종 42) 좌승지, 수원 부사, 황해도 관찰사, 1718년(숙종 44)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21년(경종 1) 술주정으로 사헌부에 의해 탄핵당했으나 큰 벌을 받지는 않았다. 뒤 이어 우승지, 좌부승지, 대사간, 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12월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를 흉참(凶慘)하다고 지적하였다가 파직당했다.
소론이 득세하여 윤증(尹拯)이 노론의 거두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철폐하자 이에 항변하는 상소를 올렸다. 1721~1722년 경종 즉위 초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경산에 유배되었다가 동래로 옮겨졌다. 1725년(영조 1) 노론 집권 후 풀려나 예조 참의,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26년(영조 2) 경기도 관찰사, 1727년(영조 3) 윤3월 예조 참판, 6월 대사헌을 맡았다. 같은 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됨에 따라 사헌부 대사헌 자리를 내놓고 낙향하였다. 1728년(영조 4)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분에 못 이겨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66세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행촌[살구골]에 있다. 족종손(族從孫)인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묘갈을 썼다.
[상훈과 추모]
이교악의 신도비는 이조 참의 홍락순(洪樂純)이 쓰고, 이조 참의 이득배(李得培)가 전하여 1771년(영조 47)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