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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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靑年團 楊州支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정수 |
설립 시기/일시 | 1949년 12월 19일 - 대한청년단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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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53년 9월 10일 - 해산 선포 |
성격 | 청년 단체 |
설립자 | 이승만 |
[정의]
1949년 12월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설립된 대한청년단 소속 지회.
[개설]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李承晩)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 기반과 반공 활동을 강화할 목적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던 청년 단체를 하나로 모아 결성한 단체이다. 이승만을 총재로 하여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유진산(柳珍山)·신성모(申性模) 등이 최고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원은 200만 명에 이르렀다.
[설립 목적]
결성 선언문에 의하면,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至急)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도구배(徒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버리기를 맹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변천]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전국 조직이 결성되었다. 대한청년단 양주지회도 이때 결성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0년 1월 최고위원회제가 폐지되고 단장제로 바뀌었으며 당시 최고 위원이었던 신성모가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제2대 단장으로 민족청년단 계열 안호상(安浩相)이, 제3대 단장으로 김윤근(金潤根)이 취임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 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청년방위대라는 반군사(半軍士) 조직으로 만들어 향토방위를 맡겼다.
1·4 후퇴 때에는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설치령에 준하여 국민방위군으로 재편했으나 김윤근 단장[국민방위군 사령관] 등이 거액의 자금을 착복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대한청년단은 약화되었다. 이후 제4대 단장 안호상과 제5대 단장 유지원이 대한청년단 재건을 모색했으나 실패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청년단을 민병대에 규합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1953년 9월 10일 해산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청년단 양주지회도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청년단 양주지회는 대한청년단 설립 선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치안 유지와 정권 지원, 향토방위, 반공 활동 등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대한청년단 양주지회를 비롯한 대한청년단의 단원들은 독자적 역할보다는 이승만 정권을 위한 청년 보위대로서 이승만에 대한 지원 활동을 주로 전개했으며 면 단위까지 조직되어 있었다. 예컨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 남양 홍씨 문중의 홍종원은 남면 단장을 맡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독자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어서 다양한 청년 운동을 벌이지는 못했지만 6·25 전쟁 전후 시기 경기도 양주 지역의 반공 운동과 향토방위, 치안 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