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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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津 |
이칭/별칭 | 양진,광진도,광나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학수 |
[정의]
고려와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의 남쪽 한강 부근에 있었던 나루.
[개설]
고려와 조선 시대 때 국가에서는 교통로 상의 강변 요충지에 진[혹은 관진(關津)·진관(津關)]이나 도(渡)·도진(渡津)을 설치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검색하거나, 여기에 배치된 관선(官船)인 진도선(津渡船)[나룻배]를 이용하여 국가의 명령 전달이나 사람과 물자 수송 등 교통과 통신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유명한 나루로는 압록강 주변의 압록도(鴨綠渡), 예성강 주변의 벽란도(碧瀾渡), 임진강 주변의 임진도(臨津渡)·장단도(長湍渡), 한강 주변의 조강도(祖江渡)·양화도(楊花渡)·사평도(沙平渡) 등이 있었다.
이들 주요 나루에는 고려 태조 이래 진도선의 운행을 담당하는 진척(津尺)이 있었으며, 성종 때 이후에는 구당(勾當)이라는 관원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운영 경비의 조달을 위해 진전(津田)이 지급되었으며, 진척에게는 위전(位田)이 지급되었다.
조선 시대 때 한강 주변에는 광진을 비롯하여 한강도(漢江渡)[이전의 사평도]·노량진(鷺梁津)·낙하도(洛河渡)·삼전도(三田渡)·양화도 등의 큰 나루[대도(大渡)]들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종9품의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 각 진의 운영과 관리를 맡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아록전(衙祿田)으로서의 도전(渡田)이 8결씩 분급되었으며, 진부(津夫)[관아에 속한 나룻배의 사공]에게는 약 1결의 진부전이 주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오늘날 서울 강북의 광진구 광장동과 강남의 강동구 천호동을 연결하는 다리인 광진교와 천호대교 주변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양진(楊津) 또는 광진(廣津)[광나루]으로 불리었다. 다리가 없었던 조선 시대 이전에도 이곳은 강북의 한양·양주와 강남의 광주(廣州)를 거쳐 하삼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이르는 길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에 일찍부터 진(津) 또는 도(渡)가 설치되어 국가의 통제와 관리를 받게 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56, 지리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에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남평양성이라고도 함]이다. …… 삼각산(三角山)[신라에서는 부아악(負兒嶽)이라고 불림], 한강(漢江)[즉 사평도], 양진[신라 때의 북독이던 한산하(漢山河)를 중사(中祀)로 올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종실록(太宗實錄)』[권20, 태종 10년 9월 2일]에 상왕(上王)이 친히 건원릉(健元陵)에 제사하고, 풍양들에 머물렀다. 이튿날 임금이 광나루에 나가 영접하여 잔치를 베풀고 밤에 돌아왔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52, 세종 13년 5월 18일]에는 범의 머리를 양진과 광진에 담갔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기조에 대천(大川)으로 말하면, 한강(漢江)은 그 근원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나와 …… (양근) 남쪽에서 용진도(龍津渡)가 되고, 사포(蛇浦)로 들어가서 두 물이 합하여 흘러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가 되었으며, …… 경상·충청·강원도 및 경기 상류(上流)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광진승(廣津丞)을 겸함],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벽란도승(碧瀾渡丞)을 겸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조에는 양진은 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11, 경기 양주목 산천]에 양진은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교량]에는 미호진(渼湖津)은 독음면(禿音面) 남쪽 60리에 있으며, 사선[私舡] 1척이 있다. 광진은 고양주면(古楊州面)의 치소에서 남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진(津) 소속의 배는 3척인데, 미호진과 함께 광주 경계에 접해 있다[渼湖津在禿音面南距六十里, 有私舡一隻. 廣津在古楊州面南距八十里, 有津舡三隻, 與渼湖津皆接廣州境].
[내용]
1. 광진의 명칭
광진 북쪽에는 아차산성이, 남쪽에는 몽촌토성·풍납토성이 있고, 『고려사』 지리지 남경유수관 양주조에는 한강과 양진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부터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교통상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공식 자료로 처음 확인되는 광진의 명칭은 양진인데, 양진은 『고려사』 지리지 남경유수관 양주조에 양주 관내의 삼각산, 한강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고려사』에서는 광진이란 명칭이 확인되지 않는다. 광진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인 1410년(태종 10) 9월에 임금이 광나루에 나가 건원릉에 제사지내고 온 상왕 정종을 영접하여 잔치를 베풀고 밤에 돌아왔다는 『태종실록』 기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양진 혹은 광진의 뜻은 ‘양주[혹은 광주]에 있는 진’이란 의미 또는 ‘광주로 가는 진’이란 의미로 붙은 이름으로 여겨진다. 먼저 전자의 의미로 썼다고 보는 근거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양주도호부조에서는 양진이라 하였고 광주목조에서는 광진으로 표기한 사례가 보이며, 1431년(세종 13) 기사에서는 강변의 양쪽을 뜻하는 양진과 광진이 한 문장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의미로 썼다고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양주목 산천 조에 “양진은 광진도라 하기도 한다”와 같이 둘 다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지도서』 경기도 양주목 교량 조에서는 양주의 나루를 소개하면서 양진이라 하지 않고 광진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광진이 ‘광주로 가는 나루’라는 의미로 파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설에는 광진을 ‘너븐나루’라고 하여 강폭이 넓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시기적으로 볼 때 광진은 고려 시대까지 양진으로 불리다가, 조선 초기에는 양진과 광진이 함께 쓰였고, 후기에는 광주의 송파진이 부상함으로써 주로 광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2. 국가의 제사처이며 경승지
광진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이래 국가에서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주도호부 남쪽에 있는 양진에 제단을 쌓고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연대기에는 1431년(세종 13) 5월 18일 범의 머리를 양진과 광진에 담갔다는 기사가 전한다. 또한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鄭敾)의 작품 가운데 1741년에 제작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광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광진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고 아울러 조선 시대 때에는 당시 사람들에게 광진이 서울 교외의 수려한 풍광을 지닌 경승지 중의 하나로 여겨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1. 고려와 조선 시대의 광진
광진은 현재 한남대교 근처의 나루였던 사평도와 함께 고대 이래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기에 고려·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중시되었다. 고려 때에는 수도 개경(開京)에서 한강 이남 방면으로 갈 때 장단도나 임진도를 이용하여 양주[당시 치소는 한양]를 지나 사평도나 양진[광진]을 건너가는 길이 주요 간선로(幹線路)로 이용되었다. 양주가 1067년(문종 21)에 남경(南京)으로 승격되면서 양진[광진]은 사평도와 함께 강을 오가는 인마(人馬)와 물자들로 더욱 붐볐을 것이다.
한강은 고려 이래 조세 운송로, 즉 조운로(漕運路)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이를 계승하여 조선 초에는 한양[서울]을 중심으로 상류에는 좌수참(左水站), 하류에는 우수참(右水站)을 설치하였다. 광진은 좌수참에 속하였고, 좌수참의 좌도수참전운판관이 광진도승을 겸하여 조운을 관장하면서 사람의 왕래를 감시·조사하였다. 세종 때에는 광진의 업무가 많아 강 건너편에 삼전도를 개설하였고, 세조 때에는 광진의 조운과 진도 관리를 분리하여 삼전도승에게 광진의 관리를 맡게 하였다.
조선 후기 때에는 한강의 각 나루 책임자가 도승에서 군영(軍營)의 별장(別將)으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에 한강 변 진도의 관리가 병조 예하의 각 군영(軍營)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광진이나 삼전도보다 송파진(松坡鎭)이 상업과 교통의 요지로 부상하였다. 그래서 광진은 송파진, 삼전도, 동잠실(東蠶室), 독음진(禿音津) 등의 나루와 함께 송파진의 별장 관할이 되었다. 송파진 별장의 관할 아래 있던 조선 후기 광진 소속의 진선(津船)은 4척이었다. 그리고 세종 때 광진에 지급된 진부(津夫)의 위전(位田)이 3결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의 진부는 3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근현대의 광진
고려·조선 시대 이래 광진은 양주에 속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다가, 1949년 면 전체가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성동구에, 1995년에는 성동구를 둘로 나누어 그 동쪽을 광진구라 하면서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 만들어진 구의 이름은 물론 광진에서 유래한 것이다. 광진은 1936년에 광진교가 놓이면서부터 나루로서의 기능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