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권승묵(權承默)은 강기동(姜基東) 의병 부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경기 북부 지방에서 활약한 강기동 의병 부대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경기도 양주·양평·포천·연천과 강원도 가평 등지의 산간 지대를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권승묵은 1909년 12월 강기동 의병 부대에서 강원호(姜元鎬) 등과 같이 물미장[물미는 깃대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김인범(金仁凡)은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김인범은 김봉기(金奉基) 의병 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1907년 우리 민족의 군사무력(軍事武力)을 약화시키기 위해 7월 20일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였으며, 그해 8월 1일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백영년(白永年)[1883~?]은 경기도 양주군 석적면 율암리 사람으로 목수 일에 종사하였다[백영현(白永賢)이라고도 함. 1992년 양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주군지』에는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갈곡 출신 백영년(白永年)으로 되어 있음]. 1909년 당시 27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백영년은 1883년생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영년은 지속적인 반일 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안배언(安拜言)은 1907년 10월 25일부터 박내병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 활동을 하면서 박내병의 지휘 아래 대일 무력 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경기도 양주와 가평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벌인 두 차례 교전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08년 11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5년을 선고 받고 고초를 겪었...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유재만(柳在萬)[1882~1964]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김연성(金演性) 의병 부대에 들어가 총검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양주·연천 등지에서 적에 대항하여 싸우던 중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1908년 10월 2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유형 3년형을 선고 받고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64년 2월 2...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윤희섭(尹喜燮)[1882~?]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윤희섭은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 회복 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어서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결되는 등 충격적인 사건...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범(重凡), 호는 의암(毅庵). 양촌공파(陽村公派) 21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의병 정인태(鄭寅泰)이며,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이다. 어머니는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다. 부인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정용대(鄭用大)[1882~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정제환(鄭濟煥)[1878~1956]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8년(순종 2)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정제환은 연기우(延基羽) 의병 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연천과 삭녕[현 경기도 연천군 북부 지역] 일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음력 9월 삭녕군 서면에서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포목상으로부터 포목 수십 점을 확보하였으며,...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신(敬信), 호는 송은(松隱). 아버지는 성균관교관 정인식(鄭寅植)이다. 정충환(鄭忠煥)[1888~1962]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의병 활동 당시의 주소지는 서울 동부 연화방 39통 6호[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였다. 1907년(순종 1) 영춘[현 충청북도 단양]에서 의거를 일으켰으며, 1908년 음력 5월...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추삼만(秋三萬)[1880~1910]은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현 양주시 회암동] 출신으로, 이담면 하봉암리[현 동두천시 하봉암동]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분노한 추삼만은 같은 해 8월 황재호(黃在浩) 의병 부대에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