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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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표,장희흥 |
[정의]
1871년 경상북도 울진군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영해 이필제의 난에 가담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역사적 배경]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산적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농민층 안정을 위한 토지 개혁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강행된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면서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1860년의 북경 함락과 거듭되는 서양 세력의 침공으로 민심은 더욱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원군 집권 초기부터 농민들의 광범위한 항쟁을 불러왔다. 각종 체제 변혁과 가혹한 수탈의 시정을 요구하는 변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명화적(明火賊)의 활동도 점차 전국을 무대로 조직화·장기화되어 갔다.
이 시기 울진 지역의 상황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았다. 산이 많고 농경지가 적은 지형적 특성상 다른 지역에 비해 농업 발달이 늦어 농민층의 분화는 심하지 않았지만, 삼정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은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었다. 조선 말기의 농민 항쟁이 수취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가혹한 수탈에서 유래되고 있었던 점을 상기하면 울진 지역 농민들도 수취 체제의 모순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새로운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이 창시되어 전파되는가 하면,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참위설이 현실에 불만을 가진 울진 지역 민중들에게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일어난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교단 재건을 꿈꾸는 최시형과 결합하여 일어난 농민 항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울진 지역 농민들은 1871년 3월 10일에 동학교도와 연계하여 체제 변혁을 꾀하는 대규모 봉기를 하게 되었다.
[경과]
변란을 주도한 이필제 등은 먼저 경상북도 영해 박영관의 집에 500~600명 정도 집결하였다. 황혼녘에 소를 잡아 제물을 마련하여 형제봉에 올라가 이필제의 주도 아래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김진균이 축문을 읽었다. 최경오(崔景五)[곧 최시형]를 비롯한 강사원·박영관·전영규(全永奎)·전인철(全仁哲) 등 주요 참가자 46명의 명단을 따로 작성하였으며, 별무사(別武士)·중군(中軍)·선봉을 임명하고 차첩(差帖)을 주었다. 참여했던 사람들도 구분하여 일반 평민은 홍(紅), 동학교도는 청(靑)으로 군호(軍號)를 정하였다.
이필제 등은 머리에 유건을 쓰고 선비의 무리로 위장하고는 죽창과 조총을 들고 동헌으로 쳐들어갔다. 군기고에서 무기들을 탈취하고, 부사를 포박하여 부정부패를 추궁하였다. 부사가 항거하자 김진균·강사원 등이 칼로 쳐서 죽이고 부사의 인부(印符)를 탈취하였다. 난민은 객사를 지으려고 쌓아둔 목재와 관아 담장에 불을 질렀다.
농민군들은 다음날 오후까지 영해부에 머물면서 읍민을 위무하는 격문을 내고, 탈취한 돈 140냥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읍민들이 산으로 도망가서 영덕·영양·평해 등지를 공격하고 곧장 경성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안동부사 박제관(朴齊寬)이 영해안핵사로 임명되어 진격해 오자 이들은 일월산으로 퇴각하였다. 일월산에 들어간 인원은 30여 명 정도였다. 그 후 문경의 조령에서 다시 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영해 이필제의 난에는 다수의 울진 출신 인사들이 활약하였다. 영해안핵사 박제관이 작성하여 의정부에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체포자 105명에 대한 심문 기록인 『교남공적』에는 다수의 울진 지역 사람들이 보인다. 이 중 대표적인 사람은 변란의 모의 과정부터 참여했던 남두병(南斗柄)이었다. 남두병은 울진군 금매리 출신으로 당시 시국에 대해 반침략적·반봉건적 의식을 명확하게 보였다.
남두병은 이미 이필제를 알고 있었고, 1871년 1월 이필제를 방문하여 모의에 가담하였다. 남두병은 이필제와 시국 혁신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한 후 이필제와 함께 영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해 연안 일대 민중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봉기가 실패한 후 남두병은 체포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평해의 역속(驛屬)이었던 전씨들도 다수가 동학을 믿었고 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중심 인물은 전영규였다. 전영규는 영해 봉기에서 중군의 역할을 맡았고, 영해부 공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인철은 평해의 장교였는데 대나무 180개로 죽창을 만들어 제공하였다. 체포 후 조사 과정에서 전인철이 영해관아를 칠 때 별무사(別武士)로 장리(長吏)들에게 직접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밝혀졌다. 전동규(全東奎)는 평해 출신으로 최시형의 권유를 받아 참여하였다.
울진군 기성면 방율리 출신 전의철(全義哲)은 동학 교조 최제우를 추종하다 탄압이 심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였다. 그는 고향에 숨어 지내면서 충청도를 중심으로 지하운동을 하고 있던 동학교도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평해 일대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한편, 창과 검·화살·활 등을 제작하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전의철은 1871년 3월 10일 500여 명의 동학교도를 지휘하여 봉기한 후 황보를 거쳐 평해읍을 공격하여 군수를 사로잡았다. 그 후 이필제와 남두병 군대가 영해부(寧海府)를 공격할 때 합류하여 영해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청을 점령하였다. 이 봉기에서 영해 지역의 많은 부호들이 피살되었다.
이외에도 이 봉기에 참여하였다가 처벌된 인물 중 울진 출신으로는 전인철·전정환·황억대·손경석·남기환·전세규·전종이·황치작·남시병·안소득(安小得)·곽진봉(郭進鳳)·권기상(權基尙) 등이 있다. 평해의 전윤환·황윤구·전윤조·전한규·전서규 등 29명은 체포되지 않고 도주하였다.
[결과]
영해 봉기가 실패한 후 이필제는 문경의 조령에서 다시 난을 일으켰지만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조선 정부의 민중 운동에 대한 경계는 매우 심해졌다. 이듬해 초 문경 조령의 난에 대한 여당의 처벌 및 공로자에 대한 포상을 행하고, 곧 이어 삼군부(三軍府)의 건의에 따라 충청도감영, 경상도우병영을 비롯하여 몇 군에 포군(砲軍)을 설치하면서 삼척에 73명, 울진에 15명을 각각 배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일으킨 민중 봉기로 울진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앞서 민중의 반봉건의식을 수렴하였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