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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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諸廷坵 |
영어공식명칭 | Je Junggu |
이칭/별칭 | 대로(大路),운천(雲天)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혁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복음자리마을을 탄생시킨 빈민 운동가이자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정치인.
[가계]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대로(大路), 호는 운천(雲天).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제병근(諸炳根)과 어머니 박수연의 차남이다.
[활동 사항]
제정구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는 대흥초등학교·고성중학교를 거쳐 1962년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군 만기 제대 뒤 1971년에 복학했으나 곧바로 교련 반대 운동(敎鍊反對運動)으로 제적당하였다.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 선생을 맡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제정구는 “판자촌을 나 몰라라 하며 진리·정의·민주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빈민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973년 12월, 미국인 신부 정일우(鄭日祐)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평생 지기이자 동지로서 끈끈한 관계를 이어갔다.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民靑學聯事件)에 가담하여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학교에서도 다시 제적당하였다. 이후 1980년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1983년에는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감옥 생활 동안 천주교에 깊이 몰입하였고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세례명 바오로]로 살았다.
1975년 2월 출소 후에도 도시 빈민 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1970~1980년대에 걸쳐 경기도 시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청계천 판자촌이 강제 철거를 당하자 1977년 정일우 신부와 함께 서울시 양평동 철거민들을 데리고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로 이주하여 빈민 공동체인 '복음자리마을'을 건설하였다. 복음자리란 이름은 당시 5평[약 16.5㎡] 남짓의 판자촌 사랑방이 있었는데 작은 미사에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붙여 주었다고 한다. 복음자리는 최초 이주가 이루어진 복음자리마을과 그 주변의 한독주택, 목화마을을 통칭하는 것으로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은행동과 신천동에 걸쳐 있다.
복음자리마을은 서울시 양평동·양남동 및 문래동 일대의 판자촌 철거민 170세대가 집단 이주하여 조성되었고 한독주택은 1979년 서울시 시흥동·봉천동·망원동 등 8개 지역의 철거민 164가구가 인근에 집단 이주해 조성되었다. 목화마을은 1985년 서울시 목동에서 철거 당한 105가구가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 제정구가 경기도 시흥시에 복음자리마을을 조성하면서부터 시흥시는 한국 사회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복음자리의 역사는 시민 운동, 민중 운동, 지역 풀뿌리 운동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한국 사회 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제정구는 1984년 사면 복권을 받은 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주민분과위원장으로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빈민 운동의 대표 자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으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였다. 1987년 판자촌 강제 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아 6.10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에서 야당이 분열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자 1988년 재야 운동권을 중심으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공동대표에 취임하였다. 1991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공천으로 경기도 시흥·군포 선거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나와 재선되었다. 민주당 사무총장·원내총무·부총재 등을 맡으며 '민주개혁정치모임' 등의 정치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 높은 신망을 받았다.
1999년 2월 폐암으로 사망한 뒤 국회장(國會葬)이 거행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메마른 땅의 한줌의 소금’과 같은 인생이라고 칭송하였고 절친한 친구이자 지기였던 김지하 시인은 “그는 참된 구도자였다. 동시에 그는 참된 혁명가였다.”고 추모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제정구의 저서로는 『신부와 벽돌공』[비전21, 1997]이 있다. 유고집으로 『사람의 길』[제정구기념사업회, 2006], 『생명정치의 길』[제정구기념사업회, 2008], 『가난뱅이 하느님』[제정구기념사업회, 2010] 등이 있다.
[묘소]
장지는 고향인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제씨(諸氏) 선산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정구는1986년 2월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의 지역 사회 지도 부문을 공동 수상하였다. 민주화와 도시 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다. 1999년 10월 20일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이 창립되었고, 그 뒤 '제정구기념사업회'로 발족되었다. 매년 기일이면 유족, 기념사업회 관계자, 그리고 국내 많은 정치인들이 참여하여 추모제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