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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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命喜 |
영어음역 | Choe Myeonghui |
이칭/별칭 | 노백(老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도현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 최명희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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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7년 - 전우와 사제 관계를 맺음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전우를 태안으로 초청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벼슬을 버리고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 최명희 졸 |
추모 시기/일시 | 1929년 - 동문들이 사우를 짓고 제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9년 9월 9일 - 영정과 위패를 안양사로 옮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4월 23일 - 안양사가 태안군 향토 문화재로 지정 |
출생지 | 충청남도 태안군 |
사당|배향지 | 안양사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경력 | 승지 |
[정의]
개항기 서산·태안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 호는 노백(老柏). 경주 최씨는 서산·태안 지역의 전통 있는 성씨 중 하나이다. 최명희(崔命喜)의 일가는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활동 사항]
최명희[1851~1917]는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유학자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1877년 이이(李珥), 이황(李滉)의 사상을 잇는 기호학파 성리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사제 관계를 맺고 그의 학통을 이었다. 성품이 근엄 정직하고 학식이 높아 최명희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최명희는 1896년(고종 33) 전우를 태안으로 초청하여 강의를 하게 하였다. 전우는 5년 동안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당시 수창동]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쳐 서산과 태안 지역에 유풍을 크게 일으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복한(金福漢), 김약제(金若濟) 등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비밀리에 국권 회복을 위한 방도를 논의하다 발각되어 홍주[지금의 홍성]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최명희는 스승인 간재 전우의 학통을 이어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는 기호학파 노론의 입장을 보였다.
[묘소]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최명희는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안양사에 제향되어 있다. 최명희는 전우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였으나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까닭으로 향현사(鄕賢祠)[지방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을 모시는 사당]를 세우지는 못하다가 최명희의 동문들이 1929년 사우(祠宇)를 짓고 토담을 쌓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지냈다. 1969년 9월 9일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최명희의 영정과 위패를 전우를 모신 안양사로 옮기고 역시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안양사는 1991년 4월 23일 태안군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