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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성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41
한자 海美城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1월 7일연표보기 -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1월 7일연표보기 - 농민군 패배
발단 시기/일시 1894년 10월 28일 - 홍주성 전투 발발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1월 5일연표보기 - 해미성에 운집하여 전열을 가다듬음
발생|시작 장소 해미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지도보기
종결 장소 해미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성격 농민 전쟁
관련 인물/단체 박인호|박희인|장세화|이두황

[정의]

1894년 11월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성에서 벌어진 내포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

[개설]

1894년 이른바 예포[북접] 농민군이 내포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킬 때, 서산 지역의 동학 교도들은 예포 농민군의 주력군 역할을 수행하였다. 홍주성 전투는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동학 농민 전쟁사에 새롭게 기록해야 할 중요한 전투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이후 해미성 전투에서 또다시 결정타를 맞았다.

[역사적 배경]

내포 농민 전쟁의 최고 격전지는 홍주성이었다. 전투는 1894년 10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 전개되었다. 홍주성 전투에는 3만여 명에 이르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 전체의 농민군들이 가담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교도들이었다.

가령, 내포 홍주성 전투 패배 이후 내포 농민군의 퇴각로를 보면 주력군은 역시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홍주성을 수비하던 일본군과 관군은 대략 1,0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무기나 규율면에서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보다 월등한 입장에 있었다. 패배한 농민군은 갈산과 덕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서산군[당시 해미현] 해미성에 웅거하였다.

[경과]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오(隊伍)를 떠나지 않은 내포 농민군들은 1894년 11월 5일 해미성에 운집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당시 농민군 지도자는 박인호와 박희인이었으며, 서산 지역의 동학 지도자는 장세화 등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장위영 영관 겸 죽산 부사였던 이두황(李斗璜) 진열의 가세로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두황은 당시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경군(京軍)을 이끌고 청주 인근의 세성산에서 농민군을 진압한 뒤 일시로 공주로 진출하였다가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자 다시 유구·예산을 거쳐 해미성에 당도해 있었다.

해미성에 당도한 후 이두황 군은 11월 7일 새벽 농민군이 아침 식사할 때를 노려 황락리 방면에서 해미성을 공격하여 농민군과 2시간 남짓 혈전을 벌였다. 이때 농민군은 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하였다고 한다. 전세가 불리하자 농민군은 서산 쪽으로 후퇴하여 구산성[귀밀성]과 저성[도루성]에 진을 쳤으나 그날 오후 이두황의 공격을 받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농민군은 해미성 전투에서 불랑기(佛郞器) 11좌, 대포 4좌, 자포총 22자루, 천포총 10자루, 조총 43자루, 화약 500근 등을 관군에 빼앗겼고, 29명의 농민군이 포로가 되었다.

[결과]

해미성, 그리고 구산성과 저성 등지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곧 당진·면천·서산·태안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중 서산 매현(梅峴)에 진을 친 농민군 수는 천여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산이나 태안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방비로 주둔하다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감시하고 있었던 관군의 습격을 받고 결국은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전쟁에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농민이나 동학 교도들이 고루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중심 대오가 결성된 곳은 물론이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것도 해미와 서산이었다. 이는 내포 농민군의 주력은 서산 지역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패전 이후 농민 전쟁에 참여했던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뱃길로 인천 지역이나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고향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 교도로서 동학 정신을 계승하여 지역 사회 운동의 발전에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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