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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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覯 |
영어공식명칭 | An Gu |
이칭/별칭 | 사중(思仲),태만(苔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전기 밀양 출신의 문신.
[가계]
안구(安覯)[1458~1522]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사중(思仲), 호는 태만(苔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안강(安崗)이고, 할아버지는 시직(侍直) 안숙량(安叔良)이다. 아버지는 진사 안보문(安普文)이고, 어머니는 사인(舍人) 정지주(鄭至周)의 딸이다. 장인은 김저(金渚)이다. 첫째 부인의 아들은 안영(安嶸), 중종 대 식년시에 합격한 좌랑 안증(安嶒)과 안순(安峋)이 있고, 서자로는 안길(安吉)·안락(安樂)·안녕(安寧)이 있다.
[활동 사항]
안구는 1458년(세조 4)에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품성이 순수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머리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안구는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초에 예조좌랑에 봉하여졌으나 사의하여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의 화를 면하였다. 연산군 말에 헌납(獻納)과 예조정랑에 보임되었다.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추대한 공로로 안구는 1506년(중종 1)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어 문학(文學)·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청도군수로 전임되었는데, 수령으로서 백성을 잘 다스려 중종으로부터 비단을 하사받았다.
안구는 1516년(중종 11)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부임하였는데, 학문에 확고한 힘이 있고 일을 강개(慷慨)하게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517년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나 충언으로 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남원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안구는 1522년 (중종 17)에 사망하였다. 안구의 비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었다.
[상훈과 추모]
안구가 지방 수령으로 재직할 때 안구의 업적이 제일이라 여긴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에 기록하였다. 안구의 업적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밀주지(密州誌)』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