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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 『경남일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203
한자 -最初-地方新聞-慶南日報
영어공식명칭 Gyeong-Nam Ilbo; The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방신문
설립연도/일시 1909년 10월 15일연표보기

[정의]

1909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 성내1동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지방신문.

[최초의 지방신문 탄생]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한 신문으로『황성신문(皇城新聞)』·『뎨국신문』·『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만세보(萬歲報)』·『대한민보(大韓民報)』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서울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한 중앙지였다.

나라의 기운이 일본의 침략으로 기울어지면서 직접 총칼을 들고 무력 투쟁을 벌이는 한편,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거나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국 국민이 지방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신문 발간을 추진한 것은 1906년경부터였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밀려오면서 부산·대구·인천 등 주요 도시에 20여종의 일본인 신문이 있었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하는 지방지는 없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영남신보(嶺南申報)』를 간행하기로 하고 1906년 6월 정부로부터 신문 발행 허가를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07년 6월에는 평양에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문사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대구에서 1908년과 1910년 초에 신문 발행을 시도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대구와 평양에서 추진한 신문 발간 움직임은 진주의 유생·유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언론기관의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로서 행정·문화도시라는 자긍과 외적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이 충만한 오랜 전통이 신문의 창간을 재촉한 것이다.

[발기에서 발간까지]

신문사의 설립은 1909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울산의 대지주 김홍조(金弘祚)를 비롯한 경상남도의 유생·실업가·유지들은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진주의 재산가 김기태(金琪邰)를 소장으로 뽑고, 신문사의 형태는 주식회사로 하고 1주(株)에 50원(圓)씩 600주로 한 자본금 3만원으로 하되 2회에 걸쳐 분납토록 하는 조건으로 자본금 모집에 들어갔다. 모든 경제가치의 기준이 되었던 당시 쌀값이 1섬에 10원 안팎이었으니, 1주는 곧 쌀 5섬이었다.

회사 형태와 자본금 및 모금방법을 확정한 창간 주역들은 신문 발간의 취지와 중요성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발기문을 공포하였다. 『황성신문』은 이미 1909년 2월 17일 「대한우일보(大韓又一報)」라는 제하에 “경상남도 유지 제씨가 경남일보사를 설립하기로 발기하였다더라.”고 보도한 데 이어, 2월 21일자 「영남서광(嶺南曙光)」이라는 제하에 경남일보주식회사 발기문을 전재하였다.

발기문은 “어둡고 어리석은 국민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데는 신문이 그 기본이 되니, 신문사의 창립에 찬성하여 경상남도의 교육과 실업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에 선비나 서민에 관계없이 먼저 주식 모금에 참여하여 신문을 창간시킨 다음 열심히 구독하고 보급하여 신문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영남의 바람이요 희망이 아니겠는가” 하는 요지였다.

『황성신문』은 이어 2월 23일 「대경남일보(對慶南日報) 창립에 충고함」이란 사설을 통해 “영남 산천에 봄날의 우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고 새벽별이 떠올랐으니 이를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충고한다.”며, 자기 회사의 예를 들어 어려운 자금사정 등으로 휴간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들고 “지방에서 신문사를 창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경상남도 유지들의 분발과 노력으로 반드시 성공하여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증진시킬 것으로 생각한다.”고 격려하였다.

그간에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으니, 『황성신문』은 4월 6일 「김씨 의무」라는 보도를 통해 김기태 임시사무소장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참여자가 느는 등 잘 진척되고 있다고 하였고, 같은 해 『경남일보』보다 4개월 앞서 발행되기 시작한 『대한민보』는 6월 22일 「경남일보 청인(請認)」이란 보도를 통해 “신문사에 필요한 자금은 진주를 중심으로 모으고 있고, 신문 발간의 목적은 실업이며, 편집 겸 발행인은 울산의 김홍조로서 경남관찰부를 통해 내부인가를 얻어 발행한다니 한국인이 지방에서 신문사를 설립하는 것은 경남일보가 효시가 된다.”고 하여 신문 발행허가 청원을 알리고 있다.

당시 신문사의 설립은 1907년 7월 제정된 악법, 이른바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에 의해, 발행지를 관할하는 관찰부를 경유하여 내부대신에게 청원, 허가를 얻게 되어 있었다. 6월에 청원한 내부인가는 3개월만인 8월 19일에 이루어졌다. 한편 제3종 우편물인가가 난 것은 창간 1주일 뒤인 10월 22일이었다. 정부의 신문 허가가 있자 주역들은 신문 발간에 필수적인 인쇄시설 확보에 나섰다. 인쇄시설 확보는 김영진(金榮鎭)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시종원 시종(侍從)을 거쳐 홍천 및 안성 군수와 경흥부윤을 역임한 인물로, 서울에 있는 우문관(右文館)이 보유한 시설을 매입하였다. 근대 활판시설을 갖추고 있던 우문관의 건물과 시설은 당초 서울에서 신문 창간을 준비하던 대동일보사(大同日報社)에서 매입하기로 한 차례 계약한 바 있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던 것이었다. 인쇄시설을 확보한 것은 같은 해 9월 『황성신문』과 『대한민보』의 보도로 확인된다.

인쇄시설을 확보한 주역들은 편집을 주관할 주필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을 초빙하였다. 경상남도지역에는 신문 발간의 경험이 있는 인물도 없었으려니와 중앙에 있는 저명한 언론인을 초빙하여 신문의 성가(聲價)를 높이고자 한 것이다. 그는 1902년 이래 황성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썼던 당대의 대표적 언론인이요 저술가였다. 그는 이 논설로 1906년 2월까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어 사장직을 사임한 후 대한자강회·대한협회·교남교육회와 같은 단체 결성을 주도하였고, 휘문의숙장(徽文義塾長)과 평양의 일신학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활동과 저술을 하다가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海潮新聞)』주필을 맡았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해 있었다.

주필직을 수락한 그가 진주로 내려온 날은 1909년 9월 29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진주 촉석루에서 열린 대한협회 연설회에 참석했는데, 김홍조·김영진 등이 참석해 그의 뜻을 굳히도록 한 것 같다. 『대한민보』는 ‘장씨 남하’를 보도했고,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진주인창경남일보빙장지연위주필(晋州人創慶南日報聘張志淵爲主筆)’로 알리고 있다.

그리하여 1909년 10월 12일 주주총회를 열어 주필에 초빙된 장지연을 크게 환영하고 그동안 추진경과에 대한 보고와 운영과 편집방침을 거듭 확정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황성신문』이 보도하였다.

[창간과 주지(主旨)]

1909년 2월 창간을 발기한 뒤 8월 19일 발행허가를 받아 인쇄시설을 확보하고 주필로 장지연을 초빙한 경남일보는 10월 15일 유서 깊은 진주성에서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신문이 창간되자 전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축사가 답지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축사 내용은 최초의 지방신문에 대한 격려와 국민계몽에 진력할 것 등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축사를 보낸 사람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와, 『황성신문』주필과 사장, 그리고『대한매일신보』주필을 역임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민족사상 고취에 앞장섰고,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겸곡(謙谷)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하여 내각총리·궁내부·내부·법부·농상공공부 대신과 내각 서기장, 평남·북 관찰사를 비롯한 전국의 관찰사와 한성부윤, 중앙의 정치·사회 단체장, 경상도 각 군수와 학교장 유지 등이 축사를 보내 연일 게재하였고, 중국 호남인 황국영(黃國英)과 일본에 유학 중인 장택상(張澤相) 등이 해외에서 격려하였다.

이 중 박은식은 “온당하고 건전한 필력을 떨쳐 공정한 언론으로 일으켜 세우려는 가득한 열정으로 훨훨 날고 있으니, 오늘의 천부가 내일에 만부가 되고 또 다음은 수십만 부가 될지어다.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아침 해와 같이, 어디든 가리지 않는 봄바람 같이, 때로는 태산이 진동하는 우레와 같이 완고함을 깨우치고 남녘의 나침반이 되어 어둠을 헤매는 이 없도록 할지어다. 우리 동포의 문명사상 증진과 교육과 산업발전과 애국정신을 계도할 목적으로 설립된 신문사로서 부강한 나라의 튼튼한 기초를 다져나갈 경남일보에 무한한 축하를 보내노라”라고 하였다.

『황성신문』은 「독경남일보(讀慶南日報)」란 사설을 통해 “깊어가는 가을 멀리 남쪽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새벽별이 떠오르는 듯, 횃불이 사방을 두루 비추는 듯한 문명기관”이라며 “곧 우리 겨레의 어진 스승이며 겨레의 경종(警鐘)이요 복리일 것이니 열심히 구독하며 분연히 일어설지어다.”라고 격려하였다.

신문의 주지(主旨)는‘민지개발(民智開發)과 실업장려(實業獎勵)’로 압축시켰다. 정치적 의미보다 우매한 지방민을 깨우침으로써 지식수준을 높이고 농업·공업·상업 등의 실업을 장려함으로써 교육과 실업을 통해 국권회복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편집 방향에 대해서는 법률 행정의 관계, 실업의 지식, 교육의 발달, 삼강(三綱)의 일사(逸史)로 요약하였다. 그러면서 법률과 행정의 관계는 변혁기에 쏟아져 나오는 각종 법령을 알려 피해가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고, 산업에 관한 지식과 교육을 통해 국가의 부강과 독립의 기초를 다지면서 충신·효자·열녀·절사 등을 소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 전통적 윤리 도덕으로 국가사회에 선량한 풍속을 가꾸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창간호는 사설을 통해 신문사의 설립과 신문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 주지에 입각한 신문을 펴냈다.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6단 36행, 1행 13자 국한문을 혼용하여 1면에는 외보(外報:외신), 현행법령으로 민적법(民籍法)·지방민권자치제(地方民權自治制), 삼강의 일사를 게재하였고, 2면에는 신문사 발간 취지를 알리는 사설과 잡보(雜報)로 중앙정계 소식과 수문쇄록(隨聞鎖錄:지방소식), 3면에는 창간 축하내용, 4면에는 관보(官報)와 농업계·공업계·상업계 흐름과 교육소식, 사고(社告) 등으로 배치하였다. 이 같은 편집체제는 다소 변동이 있었으나 한일합방 이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창간 주역들]

창간 초기 신문사의 진용은, 사장 김홍조, 대변(代辯) 사장 정홍석(鄭鴻錫), 부사장 강위수(姜渭秀), 총무 조민승(曺旼承), 대변 총무 서진욱(徐珍旭)·정희협(鄭禧協), 회계감사장 김기태, 회계 강주식(姜周湜), 이사장 최인훈(崔寅熏)이었으나 6개월 뒤 1910년 4월 12일 주주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사장 강위수(초대 부사장), 부사장 김기태(초대 회계감사장), 총무 겸 회계 정희환(鄭喜煥), 회계감사장 강주식(전 회계), 이사장 서진욱(전 대변 총무)으로 바뀌었다.

초대 사장 김홍조는 사장직은 사임하였으나 발행 겸 편집인으로 계속 남아 있었고, 주필 장지연과 인쇄인 이준기(李俊基)는 이동이 없었다. 대변제가 없어진 것은 사장 김홍조와 총무 조민승이 각각 울산과 김해가 주거지였기 때문에 부재시에 대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가 진주 사람들로 메운 것이다. 이어 1911년에는 인쇄인이 이기홍(李基弘)으로 바뀌었는데 그는 신문사 창간을 위해 우문관 인쇄시설을 인수할 때 기술 책임자였다. 1912년에는 초대 대변 사장이었던 정홍석이 사장이 되었다.

이들 임원진과 신문사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면면을 보면 인쇄시설 매입을 주도하였던 김영진과 김홍조·정홍석 등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던 인물과 지방 관직 출신과 유생, 학회나 학교에서 활동하였거나 계몽단체인 대한협회에 관여하였던 사람과 지방의 재산가들이었다.

김홍조[1868~1922]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초토사(招討使), 경상좌도 병마우후(兵馬虞候) 등의 무관직과 통정대부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한 울산의 재력가로 나중에 경남은행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활동한 재력가였다. 정홍석은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문장가로 비서원(秘書院) 비서랑(秘書郞)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백관상소(百官上疏)에 참여한 인물이다.

2대 사장 강위수는 평북관찰부 주사 출신으로 경남 제2의 재산가로 꼽힐 정도로 경제적 지위가 상당한 인물로, 1920년대 일신고보 설립 발기와 기성회부회장을 맡아 벼 300섬을 기부하였고, 창간 임시사무소장으로 활약한 김기태(2대 부사장)는 진주를 대표하는 재산가로 진주군 학무위원, 동봉양학교 및 독명학교 교장, 경상농공은행 취제역,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신재단을 발기하고 기성회 고문이 되어 벼 1,200섬을 내놓았고, 보성전문학교에 15만원을 기부한 재산가였다.

총무 조민승은 관직 참서(參書)를 지낸 뒤 대한협회 김해지회장을 맡는 한편,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고, 서진욱은 관찰부 주사를 지낸 사람으로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을 맡은 상당한 재력가였고, 정희협은 사천 곤양 출신으로 경남도 참사를 역임했으며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창간시 회계와 개편시 회계감사장직을 수행한 강주식은 국채보상경남회를 주도하고 미주(美洲)에서 발행되던 『공립신보(共立新報)』의 국내 발매소를 운영한 바 있으며 중추원 의관(議官)을 지냈다. 이밖에 강선호(姜善昊)·최인훈·이완종(李完鍾)·강한초(姜漢初)·김병태(金炳台)·이규범(李圭範)·김명현(金明見)·이원렬(李元烈)·김정호(金正浩) 등도 상당한 재산가로 학회나 학교를 지원한 지주나 상공업자와 도내에 거주한 지식인들이었다.

[신문사 경영]

주식회사로 발기한 신문사는 주주 모집으로 일부 자금이 마련되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주식대금이 기대치에 못 미치는 재정난에다 인쇄기술 부족으로 정상적인 발간이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창간 초기에는 임직원의 보수를 제때에 지급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신문 발간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 및 우송료를 조달하지 못해 허덕이게 되었다.

애초 일간 형식을 취한 신문은 창간호를 낸 뒤 각종 설비의 미비로 3주간 휴간을 하였다가 또 고장이 생겨 1주간을 건너뛰는 등 인쇄시설의 잦은 고장과 재정난으로 창간한 지 2개월 보름 동안 18호를 내는 데 그쳤다. 그때마다 사고(社告)와 사설을 통해 사정을 알리고 주주들에게 청약한 주금 납부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창간 이듬해인 1910년부터 간행 형식을 일간에서 격일간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신문 구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창간 초기에 경남도 내 2부(府), 27개 군, 459개 면, 5,500여 마을에 신문을 해독하는 인구는 도민 전체의 200분의 1인 6,300여명으로 잡고 신문의 배포선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배포선은 중앙지들도 지방관아에 신문을 보내 구독토록 하고 관아를 통해 구독료를 징수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보급계획에 따라 초기에는 각 동리마다 1부씩 발송하였다. 『대한매일신보』도 1909년 11월 24일 「경남보 확장」이란 제하에 “매동(每洞) 일도식(一度式) 분전(分傳)하기로 계약하여 현금(現今) 간행도수가 8천여도(度)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매일 발행을 약속하고도 인쇄설비의 잦은 고장과 재정난으로 신문을 제때에 내지 못해 구독료 징수의 어려움은 물론 독자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1910년 통계인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일 평균 발행부수는 2,689부로 일본 2부, 중국 1부씩을 보냈고, 경상남도가 아닌 전국에 140여부가 발송되었으며, 1910년 3월부터는 「문명록(文明錄)」이란 고정란을 만들어 구독요금을 낸 개인과 기관을 일일이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문명록」으로 본 신문 보급망은 서울을 비롯하여 개성, 평안남도 삼화(三和), 함경북도 경성과 부령, 경상북도 대구·상주·안동, 충남 비인(比仁), 전라남도 순천, 제주에 이르는 전국망을 형성하는 등 차츰 안정되었다. 이와 함께 광고도 점차 늘어 도내는 물론 서울·인천·평양·진남포·경성 등 전국적 분포를 보였으며, 업종도 서적·약품·재봉틀 등 기계류와 염료·인쇄·병원·학생모집·잡화·정미소·포목·부음(訃音) 등으로 다양해졌다.

또한 신문사가 어려움을 호소하자 전국에서 기부금이 답지되었다. 신문사 부사장인 김기태의 조모(祖母)가 금화(金貨) 60원을 보내왔고, 박영효가 금화 50원, 강위수 사장이 금화 5원을 냈고, 창원·동래·하동·고성·안의·함양·함안·남해 등지 학교와 유지 등의 기부금이 답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6월 21일에는 제100호 기념과 함께 신문사의 새 사옥 낙성식을 가졌다. 같은 날 들어온 기부금은 사장과 부사장이 각각 50원씩 낸 것을 비롯하여 황철(黃鐵) 관찰사 등이 40원을 기부하는 등 진주·사천·하동·울산 등 도내 유지들이 기부금 대열에 참여하여 수백원이 모아지고, 창간 초부터 시작한 외간물 인쇄 등을 통해 경영은 차츰 안정되어가는 듯하였다.

신문 또한 거름 없이 간행되어 제자리를 찾으면서 편집실과 사무실 요원의 공개 채용을 할 만큼 여력이 생겼으나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은 더욱 거세져 사전검열과 발매금지·압수·정간 등에 의한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경술국치와 수난]

『경남일보』에 대한 검열 자국인‘말뚝활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0년 1월 31일 사설 「고대한인(告大韓人) 각 신문사(各新聞社)」라는 제하에 ‘경남일보 기자 배고(拜告) 아대한인(我大韓人) 각 신문사 기자 제군(諸君) 좌하’라는 부제만 살아 꿈틀거리는 가운데 본문 64줄이 깡그리 말뚝활자로 조판되어 있고, 같은 날짜 잡보란에 제목조차 뭉개진 37줄이 거꾸로 까맣게 조판되어 있는 등 3월 5일과 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관련된 기사와 5월 20일과 22일 이재명(李在明) 의사의 변론부분이 삭제되었고, 5월 28일과 30일에 삭제된 기사는 신임 경부(警部)의 인물 소개 부분과 순사를 자칭한 자가 행패를 부린다는 보도였다.

급기야 8월에는 내각 대신을 공격한 기사가 치안방해로 압수처분을 당하는 등 수난이 연속되는 가운데 8월 2일에는『제국신문』을 폐간시킨 데 이어 8월 27일에는 『황성신문』을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강제 개제하였다가 곧 폐간시켰으며, 28일에는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개제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고, 31일에는 『대한민보』 마저 폐간시켰다.

일제는 국권 침탈을 전후로 8월 한 달 동안 중앙에서 발행하던 민족지를 모두 없앴다. 이로써 한국인을 위한 국문지는 서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진주의 민간 일간지 『경남일보』뿐이었다. 『경남일보』로서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와중에 창간 1주년을 앞둔 10월 11일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망국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의‘절필(絶筆) 4장’을 실어, 이로써 10일간의 정간을 당하여 창간 1주년이 최대 수난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의 통제는 계속되었다.

[편집체제와 내용]

창간 주지(主旨)로 내세운 민지 개발과 실업 장려에 바탕을 두고 법률과 행정의 관계, 실업의 지식, 교육의 발달, 삼강의 일사로 요약되는 편집체제는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국한문을 혼용하였다. 지면 구성은 약간 변동은 있으나 대체로 제1면에 외보(外報)·현행법령, 고정란인 상강의 일사(逸史) 시문(詩文) 란인 사조(詞藻), 제2면에는 사설·잡보·중앙정계·경성(京城)통신·수문쇄록(隨聞鎖錄), 제3면에는 문명록(文明錄), 관청소식·교육소식·농업계·상업계·공업계·단평란인 여묵촌적(餘墨寸滴), 제4면에 관보·광고 등을 실었다.

기사 내용은 주로 실업 장려와 민지 개발에 관심을 두면서 상공업과 교육을 장려하였으나 정치문제는 중앙과 지방 정계의 동향에 대하여는 보도하면서도 비판적인 입장은 취하지 않았다. 일제의 무단적인 폭압정치 아래에서 지방신문이자 한국인 발행의 신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였다. 특히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1910년 11월부터는 신문사 내에 야학과를 설치하여 한문과 법률, 일본어를 가르쳤다.

한편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에는 편집 내용이 크게 바뀌어 신문사의 주장으로 신문 본연의 한 기능인 사설이 없어지고, 민족 고유의 전통 윤리관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던 고정란 ‘삼강의 일사’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신문의 입과 전통문화를 말살시킨 것이다.

대신 서울·대구·마산·부산 통신 등 지방소식이 늘고 1911년 12월부터는‘우스운 일’, ‘해탄한 일’, ‘원통한 사정’ 등 소재에 따라 이름을 바꾼 순 한글 단평(短評)을 고정시켜 독자층을 넓히려 하였으며, 1912년 1월부터는 신문의 오락성에 관심을 가져 소설을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의 변천]

이렇듯 대한제국 말기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한 최초이자 유일한 지방지로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한국인이 발행하던 신문들이 모두 강제 폐간당한 가운데 민간지로서 무단헌병통치 아래 정간처분을 당하며 폐간 일보 직전에 이르는 등 압수와 발매금지, 삭제로 이어지는 수난 속에‘벽돌신문’을 간행하면서도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잔명을 이어오다 1915년 초 지령 887호로 폐간되었다.

한편 주필이던 장지연은 1913년 8월 사임하고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과 강전(姜荃) 등이 그 뒤를 이었는데, 신문의 폐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더욱 강화된 언론탄압과 경영난이 아니었나 싶지만 알 수가 없다. 이후 『경남일보』는 광복과 더불어 1946년 3월 1일 반공·반독재·반부패를 사시(社是)로 중창간되었으나 1980년 11월 25일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9년 11월 25일 거듭 복간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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