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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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南鄭氏 |
영어공식명칭 | Haenam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윤섭 |
[정의]
정원기를 시조이자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개설]
해남정씨(海南鄭氏)는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가운데 하나로, 해남의 토성(土姓)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 알려져 있다.
[연원]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한 정언홍(鄭彦洪)[1536~?]과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정언재(鄭彦湜)[1538~?] 형제의 본관이 해남이고 거주지도 해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해남군 성씨 조에는 윤(尹), 차(車), 김(金), 전(全), 갈(葛) 등의 성씨 가운데 제일 첫 번째 성씨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 후기 이래로 해남 지역을 중심으로 강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한 성씨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당시 해남정씨는 고려시대 때부터 호장(戶長) 직을 세습해 왔으며 조선 초기에는 해남윤씨(海南尹氏)와 더불어 향권(鄕權)과 읍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해남윤씨문헌』의 「보략(譜略)」을 따르면 해남정씨 시조 정원기는 “풍속(風俗)을 바로잡고자 자원해서 향리(鄕吏)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남정씨는 해남 일대의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다. 정재전(鄭在田)은 진도와 해남의 행정구역을 통합한 1412년(태종 12) 관아(官衙)와 객사를 건립하는 데 물자를 지원하여 향역을 면제받았고, 해진군(海珍郡)이 다시 분군(分郡)되어 독립할 때에도 노비(奴婢) 62명을 바쳐 향리역을 면제받을 정도로 당시 경제적 위상이 컸다. 이후 해남정씨는 정언홍(鄭彦洪)과 정언재(鄭彦湜)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명망을 얻기도 하였으나 직계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본관마저 없어져 족보나 가승 등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해남정씨는 직계자손들이 번창하지는 못했지만 가문의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손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등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강진 지역이 근거지였던 해남윤씨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해남정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해남에 정착함으로써 해남 지역의 명문 사족으로 성장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입향 경위]
해남정씨 시조 정원기는 해남 일대의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으며, 고려 말부터 자원해서 호장을 맡아 대대로 세습하게 되었다. 조선 초까지는 가문이 번성하였으나 이후 후손들의 관직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 집안의 계보가 이어지지 않아 묘비를 비롯해 해남윤씨 족보에서도 초계정씨로 소개되고 있다.
[현황]
해남정씨는 현재 초계정씨 후손들이 해남에 일부 남아 가계를 잇고 있다.
[관련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