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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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聳珍山|龍珍山 |
영어공식명칭 | Yongjinsan Mountain |
이칭/별칭 | 솟돌뫼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사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현창 |
전구간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사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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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 산69|사호동 산98-1 |
성격 | 산 |
높이 | 351m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과 선동·지산동 경계에 있는 산.
[개설]
용진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과 선동·지산동 경계에 있는 높이 351m의 산으로, 일제강점기 오준선(吳駿善)[1851~1931]이 후학을 가르치며 머물렀던 곳이다. 수많은 호남의병을 길러낸 산실인 용진정사(湧珍精舍)가 있다. 용진산은 전해산·심남일 등의 의병부대 주둔지였으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던 곳이다.
[명칭 유래]
우뚝 솟은 산을 ‘솟돌뫼’라 하고, 솟돌뫼를 한자로 표기하면 용진산(聳珍山)이 된다. 뾰쪽산을 풍수에서는 화산(火山)으로 보고 문(文)을 취하면 필봉(筆峰)이 된다. 용진산과 어등산은 멀리서 보면 쌍봉이며, 날카로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서편이 ‘석봉(石峰)[337m]', 토산으로 이루어진 동편은 ‘토봉(土峰)[349m]'이라 부른다. 석봉과 토봉 사이 고개는 배가 넘어간다고 하여 ‘배넘어재’라 부른다. 용진산은 왕건과 장화왕후가 작별한 곳이라고 전하며, 무안 사람들이 장성으로 가던 길목이다.
『전남폭도사』에는 '용진산(龍珍山)'이라고 기록하였다. 1910년 오준선이 일제가 지급한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고 용진정사를 지어 1917년부터 후진을 양성하며 한말 의병장들[김삼연·고광순·김준·전수용]의 열전을 기술하였던 장소이며, 전해산·오성술·조정환·심남일 의병부대의 주둔지이자 일본군과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광주지(전)』(1964)에 하늘이 가물어 용진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용진산 기슭에 죽림처사 박경(朴璟)이 1601년에 지은 가학정(駕鶴亭)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1917년에 세운 용진정사가 있다. 용진정사는 기정진 문하로 한말 민족운동가이며 성리학자인 후석 오준선이 17년간 후학들을 가르치며 머물렀던 곳으로, 수많은 광산의병, 나아가 호남의병을 길러낸 산실이었다. 용진산은 1908년 10월 22일 오후 1시 전해산(全海山)[1879~1910]과 심남일(沈南一)[1871~1910]이 이끄는 의병 150명이 합동작전을 벌여 일본군 히라노[平野] 부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보조원[밀정] 1명을 사살하고 의병 10명이 순절한 곳이다. 용진정사는 정도전과 송시열이 다녀갔다는 옛 상원사[일명 용진사]가 자리잡았던 곳이었다. 1920년대에는 최용주가 금광을 개발하면서 한때 천여 명의 광부들이 몰려들고 오일장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자연환경]
전라남도 장성군 축령산에서 내려선 산줄기가 남쪽으로 이어져서 금성산을 향한 능선이 본량에서 솟아오른 산이다. 용진산 동쪽으로 황룡강이 흐르고 임곡동과 마주하며, 남서쪽으로 우제봉으로 이어지다가 용진정사 골짜기로 내려선다. 용진산에서 다른 한 줄기는 까작골산~간나봉으로 내려가다가 평지와 황룡강을 건너 어등산으로 솟아오른다.
[현황]
용진산은 현재 광주광역시 시민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호천(沙湖川) 벼랑 소금강(小金剛)에 ‘불당일월용진수석(佛堂日月聳珍水石)’이란 명문과 함께 암벽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인 용진산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산3-1에 있는 용진정사와 용진영당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광산8경 중 하나인 용진층만(聳珍層巒)의 용진산 전체가 개발제한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