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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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希亮傳說 |
영어공식명칭 | Jeongheeryoeng Story |
이칭/별칭 | 「정희량 이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원은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76년 - 「정희량 전설」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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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7년 - 「정희량 전설」, 『거창군사』에 수록 |
관련 지명 | 금원산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정희량|영조|이인좌|안동 사람 이씨 |
모티프 유형 | 영웅적 인물의 체재 반역형 역적담 |
[정의]
경상남도 거창 출신이자 동계 정온의 현손인 정희량의 이적에 관한 이야기.
[개설]
조선 시대 무신년[1728] ‘이인좌의 난’ 주역이었던 정희량(鄭希亮)의 이적에 관한 이야기다. 정희량은 동계 정온의 현손이자 안음(安陰)의 초계 정씨(草溪鄭氏) 진사 정중원(鄭重元)의 둘째 아들인데, 어려서부터 비범한 데가 있었다. 자랄수록 재주도 있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분명한 총각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에 안동 땅의 이씨 명문에서 선을 보러 왔는데, 사람됨이 훌륭하여 매우 흡족하였다. 그러나 뒷모습에 역모상이 있어 낙심하여 혼담을 거둬들였다. 뒷날 정희량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채록/수집 상황]
정희량에 대한 이야기는 1976년 여름 안동 주민 김태순으로부터 채록하였다.
[내용]
정희량의 본명은 정준유(鄭遵儒)이며, 안음의 초계 정씨 진사 정중원의 둘째 아들이다. 정희량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비범한 데가 있었다고 한다.
정희량이 너댓 살 되었을 때에 안음 고현(古縣)의 진산(鎭山)인 금원산(金猿山)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산불 구경을 하고 있는데, 보모의 등에 업혀서 대문 밖에 나온 정희량이 "금원산에 불이 붙었으니 하늘이 솥이로구나!"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대여섯 살 때는 정희량이 서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큰 구렁이가 나타났다. 다른 아이들은 놀라서 소리치며 피하는데 정희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서 구렁이가 지나가도록 보고 있었다고 한다.
정희량은 자랄수록 재주가 있어서 학문도 높아졌다. 또 건장한 몸에 힘도 세고 날쌔어서 모든 것에 뛰어나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분명한 총각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곳에서 혼담이 들어왔는데, 안동(安東) 땅 이씨(李氏) 명문에서 혼기가 된 딸을 둔 이가 선을 보러 안음에 온 일이 있었다. 정희량의 아버지인 정 진사와 안동에서 온 이씨 사이에 인사가 끝나고 주안상이 나오자, 용모가 훤칠한 정희량이 사랑에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이씨는 정희량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씨는 비록 먼 길을 왔어도 훌륭한 사윗감을 만나게 되어 속으로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밤에 정희량이 다시 사랑에 나와서 편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뒷모습을 본 순간 이씨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희량의 뒷모습에 분명한 역모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낙심도 되고 걱정도 되어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상을 물린 이씨는 정 진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정 진사, 뭐라고 사죄해야 되겠습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실인즉 제 여식은 불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저 위장부의 배필로서는 천부당만부당함을 알았습니다. 연분이 없는 것으로 여겨 주시길 빕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 진사는 "아니, 무슨 말씀을…."라고 하고는 너무나 뜻밖이라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만 해도 혼담이 있어서 선을 봤다면 정혼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또 안동에서 안음까지 찾아오는 길이 멀고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정 진사는 "사양도 지나치면 예가 아닌데 어찌 그렇게까지…." 하고 말을 이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씨는 "아닙니다. 저는 댁의 자제가 평범한 총각일 거라 여기고 왔는데, 대면해 보니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큰 재목입니다. 그런데 제 여아는 정말로 불출이며 등신입니다. 그러니 자제의 짝이 될 수 없음을 안 다음에야 지금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상책이라 여겨서 이러하는 것입니다. 제발 통촉하셔서 이 혼담을 없었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히 부탁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정 진사와 이씨는 서로 정의를 상하지 않기로 하고 쓸쓸히 헤어졌다.
뒷날 과연 정희량은 1728년에 무신란을 일으켰고, 안동 유림의 동조를 구하러 갔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였으며, 거사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역모상을 알아본 높은 관상술을 지녔고, 혼담도 재치 있게 거둬들인 이씨의 이야기가 지금도 안동 지방에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무신란을 주도하여 민심을 움직이려 했던 정희량의 일화를 통해 그의사람됨과 조선 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풍수·도참적 세계관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정희량의 역모 설화는 거창의 민중들이 지배 계층에 대하여 가지던 비판과 저항 의식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아기 장수 전설」의 ‘새로운 세계 건설’ 실패담과도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