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
-
충청남도 당진시와 관련된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읍지. 조선 후기, 영조 때부터 헌종 연간에 편찬된 충청도 각 고을의 지리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각 고을별로 각 읍의 현황 파악 및 행정 자료의 수집이 자주 행해지면서 고을별로 읍지가 본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된 이후 16세기 말에 많은 고을에서 읍지가 편찬되었고, 조선 후기에...
-
충청남도 당진 출신인 조선 후기 문신 안민학의 개인 문집. 『풍애집(楓崖集)』은 풍애(楓崖) 안민학(安敏學)의 개인 문집으로 1권에는 시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절구(絶句), 율시(律詩)에 다 능해서 오언 율시(五言律詩),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많이 썼고, 고시(古詩)도 상당 편수가 수록되어 있다. 2권에는 기(記), 서(書), 제문(祭文), 잡저(雜著) 위주...
-
충청남도 당진시 삽교천을 비롯한 서쪽 내포 지역에 발달한 문화. ‘내포(內浦)’라는 용어는 『고려사』, 『조선 왕조 실록』, 일제 강점기 관변 자료에 폭넓게 나타난다. 사전적 의미로 '안개'로 많이 해석되고 있는데, 그보다는 삽교천이 해면 간척되기 이전에 에스트리[나팔상 삼각강]로 육지 안쪽으로 만처럼 크게 들어와 위치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추측된다. ‘내포’는 강원도 강...
-
충청남도 당진시의 삽교천 이서(以西) 지역과 차령산맥 이북의 평야. 내포평야는 차령산맥 이북의 삽교천[범근내포] 이서(以西) 지역의 평야로 일반적으로는 예당평야를 지칭하기도 한다. 건설부 산하 국립 지리원에서 나온 『한국지지』에는 내포평야를 삽교천 이서의 평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충청남도의 평야를 설명하면서 "차령 이북의 평야는 이른바 내포평야로 불리는 삽...
-
1894년 당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 내포 지역의 동학은 1880년대 초에 전파되고 18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었으나 1894년 5월 홍주 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부임하면서는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승우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고 관군을 동원하여 체포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어업 활동을 하거나 상업적인 교역 활동을 하는 곳과 배가 대안 지역으로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 근대 교통 기관이 도입되기 전에는 육로보다는 수로를 더 많이 이용했다, 이러한 내륙 수로에는 나루가 있어서 강 양쪽 지역을 연결시켜 준다. 나루는 하천가나 좁은 바다 목의 배가 다니는 일정한 곳을 말한다. 나루는 도진(渡津), 진도(津渡), 진두(津頭), 도...
-
1894년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전개한 혁명적 농민 운동. 동학농민전쟁은 안으로 정치와 사회 개혁을 이루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 혁명적 농민 운동이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에 창도한 이래, 1870년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조직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학은 당진 지역에도 유입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동학을 믿...
-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보통 육지의 주변 지면보다 높이 솟은 구조를 가진 지형. 산이란 보통 육지에서 주변 지면보다 수백m 이상 높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지형을 말한다. 보통 3,000m 이상을 고산(高山), 1,000~2,000m를 중산(中山), 500m 정도를 저산(低山) 또는 구릉이라 부른다. 연속된 경우는 산맥이라 부르며, 불연속의 많은 산이 넓게 분포하면 산지(山...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학자. 안민학(安敏學)[1542~1601]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광주 안씨(廣州安氏)의 대표적인 인물로, 율곡 이이(李珥), 우계 성혼(成渾)과 학문적 교류를 나눈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안민학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이습(而習)이며, 호는...
-
조선 시대의 문신 안민학이 아내를 잃은 비통한 슬픔을 적은 글. 1978년 봄 안씨 문중(門中)에서 38선 접경(接境)인 파주군 주내면 봉암리 방축골에 있는 선대(先代) 조모(祖母)의 산소를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선영(先塋)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시신의 관을 열었다. 이때 미이라화 된 시신의 가슴 위에 「애도문」이 놓여 있었다. 이 글은 풍애 안민학이 죽은 부인에게 간찰...